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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지도에서 지워진 곤을동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8.02.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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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찾아간 제주도였다.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벼르던 중에 잠깐 짬을 냈다. 제주는 역시 ‘따뜻한 남쪽 나라’였다. 뭍에서 극성을 부리는 찬바람도 섬에서는 꽤 부드럽게 느껴졌다.

곤을동으로 가는 길/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곤을동으로 가는 길/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조금 무거운 걸음으로 처음 찾아간 곳은 ‘곤을동(坤乙洞)’이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들르는 곳이다. 공항에서 멀지 않으니 잠깐만 시간을 내면 된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 곤을동은 아름다운 바닷가에 있다. 제주시 화북동 동제원길. 오현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비석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왼쪽 길로 조금 내려가면 별도봉 해안이 나온다.

마을은 사라지고 집 한 채 보이지 않지만, 눈 밝은 사람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금방 찾아낼 수 있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언덕, 아이들이 뛰놀고 저녁이면 호롱불이 걸릴 것만 같은 좁은 길…. 뭍이라면 사람이 깃들여 살기에는 적절치 안은 가파른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열악한 환경을 딛고 살아야 했던 섬. 절벽에 가까운 언덕이지만 대대손손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한 때 70여 가구가 있을 정도로 번성한 마을이었다. 그걸 증명하고 싶다는 듯 무너진 돌담이 어깨를 겯고 바다로 달려 나간다.

안내판에서 이 마을, 아니 제주도 전체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금세 목이라도 조일 것 같은 전율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4․3유적지 곤을동

(전략)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에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 22가구와 가운뎃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모살불’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무너진 돌담 곤을동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무너진 돌담 곤을동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한 마을이 그렇게 고스란히 지워졌다. 이방인도 아닌 동족의 손에 의해. 그 비극의 안쪽에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있었든,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들 간의 싸움이었든, 한 마을을 통째로 없앴다는 것은 끝내 이해할 수 없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이른바 '4.3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그 규정은 여전히 ‘변신 중‘이다. 명칭도 4.3 사태, 4.3 사건, 4.3 민중 항쟁 등으로, 시절이나 부르는 사람에 따라 바뀌어 왔다. 아예 장식을 떼어버리고 4․3이라 부르기도 한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4.3사건에 대한 사전적 설명이다. 내 시선은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에서 오래 머물고는 한다.

늘 그렇듯 사라진 마을을 돌아보았다. 비극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 생각 없이 머물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마을과 바다는 그리 넓지 않은 모래밭을 경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 전 마을에 살았을 어느 영감님을 흉내라도 내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돌담 사이를 걸어 내려갔다. 창백한 햇빛이 학예회의 아이들처럼 우쭐거리는 돌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 동네에도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귀청을 찢는 총소리와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그리고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을 연기. 돌아오지 않는 할아비, 아비, 삼촌…. 어린 누이의 숨죽인 오열….

폭력이 남긴 잔혹함에 새삼 치가 떨렸다. 집단과 집단 간의 폭력이든 집단이 개인에 저지르는 폭력이든 개인과 개인 간의 폭력이든,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다. 더구나 국가 권력에 의한 양민의 희생은 어떤 이유로도 저질러지면 안 된다. 이미 저질러진 일은 철저하게 규명하고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참혹한 일이 일어난 뒤로 계절마저 슬프게 머물다 갔을 곤을동. 여느 때처럼 언덕 아래 서서 사람들이 살던 곳을 향해 묵념했다. 장삼이사에 불과하지만 사죄가 가능하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올 봄에는 이 언덕에도 햇살이 아이들 웃음처럼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발길을 돌렸다.

아름다운 곳이나 행복의 흔적만 찾아가는 것만 여행일 수는 없다. 가끔은 비극의 현장 에서 누군가 흘렸을 눈물을 가슴에 새기고,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지도에서 지워진 곤을동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8년 2월 2일 (15:2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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