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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체스키크룸로프의 골목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8.03.10 10:26|조회 : 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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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체스키크룸로프 전경/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체스키크룸로프 전경/사진=이호준 여행작가

대학을 휴학한 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던 작은 아이가 드디어 여행을 떠난단다. 처음 휴학을 한다고 했을 때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시간을 낭비한다고 펄쩍 뛰었는데, 여행을 간다는 말에 아무소리 못하고 허락하고 말았다. 여행작가라는 이름을 앞세워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나로서는 아들의 여행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아니, 장려해야 할 판이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해서 돈을 모으는 기색이더니 혼자 유럽으로 가겠단다.

먼 길을 떠나는 아이에게 무슨 조언을 해줘야 하나? 나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잃지 않는 법? 풍경이 좋은 도시의 정보? 싼 숙소를 찾는 법? 하나씩 꼽아 봐도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인터넷에 온갖 여행정보가 쏟아지고, 어플리케이션만 하나 있으면 어지간한 건 예약이 다 되고, ‘구글맵’이니 ‘구글번역기’니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청년들에게 구세대 여행자인 내가 무엇을 가르쳐준단 말인가. 그래서 기껏 “풍경만 보지 말고 사람 사는 걸 먼저 봐라.” “내 경험에 의하면 진짜 아름다운 것들은 큰길이 아니라 골목길에 있더라”처럼 잔소리 섞인 조언을 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서 체코의 작은 도시 체스키크룸로프를 꼭 가보라고 덧붙였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 다르겠지만, 내 눈에는 체스키크룸로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였다. 체코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는 이 도시는 블타바 강을 끼고 있는데, 언덕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낮은 산과 붉은 지붕, 그리고 첨탑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마치 동화의 나라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도시 자체가 문화유적인 이곳은 1992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키 낮은 집들 사이로 나 있는 골목/사진=이호준 여행작가
키 낮은 집들 사이로 나 있는 골목/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체스크크룸로프뿐 아니라 유럽의 도시들을 떠돌다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부러운 게 키 낮은 집들이다. 하루가 다르게 고층빌딩이 솟아오르는 서울이 잃어버린 ‘지나간 시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부러움은 더 커진다. 건물들이 우쭐대지 않고 그만그만한 높이로 조화를 이룬 도시는 정말 아름답다. 서울에도 북촌이니, 서촌이니, 남산한옥마을이니 없는 건 아니지만, 마치 쫓기던 짐승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곳은 낮은 집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작은 골목들이다. 체스크크룸로프에 서도 이 골목 저 골목을 무작정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골목을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유난히 여유로워 보였다. 좁은 길에 의자 몇 개 내놓고 간이 카페를 연 사람, 벽에 기념품을 걸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이웃처럼 정겨웠다. 가끔 부딪히거나 걸음이 불편해도 짜증을 내는 사람은 업었다. 그 골목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켜온 것들을 사람들이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

카페에 빈자리가 없어서 주변을 맴돌다가 간신히 자리 하나를 차지했을 때의 환호성도 골목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재미다. 그렇게 작으면서도 행복을 주는 것들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시간 따라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그런 풍경을 조화의 아름다움이라고 읽는다. 오래된 것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것들의 조화. 현지인과 외지인의 조화. 국적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의 조화….

골목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길거리 카페/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골목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길거리 카페/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그런 풍경 속에 들어설 때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개발의 광풍에 밀려 ‘오래된 시간’이 쫓겨난 지 오래인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지금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종로의 피맛골이 사라진 것이다. 여전히 남아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피맛골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던 종로 1~2가는 대부분의 골목이 초대형 빌딩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골목이 하나 둘 흔적을 지우면서 600년 동안 쌓인 ‘이야기’도 사라지고 말았다. 골목은 그 자체가 문화다. 무형의 재산을 닮아서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복원할 수 없다. 다행이 요즘은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골목길들을 살리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반갑다. 그런 움직임이 상업적 목적에서 끝나지 말고 ‘문화’를 심고 가꿔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의미가 담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지워버린 ‘지나간 시간’은 늘 그리움이다. 곳곳에서 만나는 낮은 집과 골목이 부러워 자주 걸음을 멈추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그리움을 넘어 안타까움이다. 지금이라도 무작정 지우기를 멈추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 함께 생각해볼 수 있기 바란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체스키크룸로프의 골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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