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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여행, 그 위험했던 순간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8.03.3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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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위험한 적은 없었어요?”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그럴 때마다 한참 생각하게 된다. 위험? 내게 그런 일이 있었던가? 망각의 힘은 그렇게 위대하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다녀온 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하게 색이 바랜다. 또 ‘여행은 어차피 조금씩의 위험을 안고 떠나는 것’라는 믿음 때문에 마음 깊이 두지 않은 탓도 있다.

하산케이프의 새벽은 안개와 함께 시작한다.
하산케이프의 새벽은 안개와 함께 시작한다.

그런 질문을 받은 날은 지나온 걸음을 돌아보기도 한다. 기억 창고를 차곡차곡 뒤져보면 내게도 위험한 일이 꽤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실 뭉치의 끄트머리를 잡고 당기는 듯, 위험했던 장면들이 하나 둘 따라 나온다. 타고 가던 캠핑카가 스웨덴의 눈밭에 박혀 죽을 뻔한 일, 상하이 어느 뒷골목에서 강도로 보이는 청년들에게 끌려갈 뻔한 일, 쿠르드 지역에서 한밤중에 총을 멘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마주쳤던 일… 아! 하노이에서도 위험한 적이 있었구나. 그중 티그리스 강 상류의 고대도시 하산케이프에서 캉갈에게 공격당할 뻔한 일도 여전히 등에 땀이 흐르게 한다.

하산케이프에 두 번째 찾아간 건 새벽이었다. 그렇게 서둘렀던 건 양을 몰고 초원으로 가는 목동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 초원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어두울 때 길을 나선다. 티그리스 강을 따라 하산케이이프로 가는 길은 온통 안개 세상이었다. 인적 없는 작은 도시에 안개가 들개 떼처럼 우우 몰려다녔다. 그런 풍경 속에서도 쉬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 그들은 합창대회라도 하는 듯 부지런히 고요를 밀어냈다.

동굴집들이 있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다. 허덕거리며 언덕을 오르자 어둠 속에서 양과 염소들이 내는 소리가 옹알이처럼 들려왔다. 어둠은 조금씩 옅어지는데 안개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티그리스 강이 강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아침마다 토해냈을 안개. 그 안개 속에 세월의 냄새라도 배어있나 싶어 혼자 킁킁거려보기도 했다.

위기와 마주친 건 그 순간이었다. 어둠, 아니 안개 저쪽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내는 공격 직전의 경고가 틀림없었다. 공포로 온몸의 털이 송곳처럼 일어섰다. 보이지는 않지만, 안개 저쪽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짐승은 분명 캉갈이었다. 캉갈은 터키의 나라개(國犬)이자 터키사람들의 자랑이다. 원산지는 터키 중부 캉갈(Kangal)이라는 조그만 읍. 주로 양치기개로 쓰이지만 힘이 무척 좋아서 트랙터 한 대를 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늑대와 1대1로 싸우면 이길 확률이 50%이상이며 두 마리가 협공하면 식은 죽 먹기라는 말로 캉갈의 용맹성을 설명한다. 그렇게 엄청난 힘과 용맹을 가졌지만 주인에게는 순한 양처럼 군다. 그에 반해서 침입자에게는 단호한 응징을 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가 뜨기 전에 양과 염소를 몰고 초원으로 가는 하산케이프의 목동.
해가 뜨기 전에 양과 염소를 몰고 초원으로 가는 하산케이프의 목동.


그런 녀석과 안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것이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지척이었다. 그 순간 개에게 나는 지금 침입자일 뿐. 아무리 둘러봐도 무기로 삼을만한 것 하나 없었다. 하긴 몽둥이 하나쯤 있다고 한들 날쌘 몸과 무지막지한 힘,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에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진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들여다보는 자아라니. 죽기 직전에 살아온 날들이 영상처럼 스쳐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안개 저쪽의 절대자에게 안개 이쪽의 생명은 ‘먹이’와 다르지 않았다. 개와 사람 간에 설정된 상식의 관계는 안개 하나로 철저하게 무너져 있었다. 폭력의 ‘갑을’만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을’이었다. 얼마나 허세 속에 살았던가. 그런 자각들이 빛의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끝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반전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츼츼츼!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양치기 청년이었다. 거짓말처럼 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멈췄다. 또 한 번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기라도 할 듯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시 ‘허세의 나’로 돌아오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충격의 여운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여행자!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진짜 ‘나’를 만나려 떠도는 구도자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위험과 마주한 뒤에도 여행을 멈춘 적은 없다. 위험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잠시 운이 비껴났던 것이고, 아직 만나지 못한 세상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위험한 곳에 진짜 보고 싶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낯선 땅으로 자꾸 등을 떠민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의 미소와 숨겨진 이야기, 아름다운 풍광은 여전히 나를 전율하게 만든다. 여행자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여행, 그 위험했던 순간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8년 3월 30일 (15:32)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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