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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세계는 모두 하나의 유리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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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세계는 모두 하나의 유리 감옥

머니투데이
  • 김정수 시인
  • 2019.01.12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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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이성목 시인 '함박눈이라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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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한 이성목(1962~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함박눈이라는 슬픔'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애환이 진하게 녹아 있다. 고향 경북 선산에서 광주로 이주한 시인에게 가장 큰 장벽은 말(言)이다. 전라도 말을 하는 광주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시인은 "외딴 섬이거나 산중 암자"('시인의 말')일 수밖에 없다. "사람의 혀에 칼이 있다는 거"('뼈 울음')를 실감한 시인은 침묵하거나 동화되거나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시인들과 어울려 '다른 이의 삶' 같은 낯선 삶을 시로 쓴다. 말(사투리)에는 시인이 일차적으로 겪는 장벽뿐 아니라 지역적 배타성, 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와 좌절 등이 함축되어 있다.

처음에는 한 알의 모래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모래의 서걱거림 모래의 쿨럭임 모래의 헛기침이 사라진 곳으로 가기를 원했다
더 이상 무너지지도 깨어지지도 않는 한 알의 모래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계는 모두 하나의 유리 감옥

낯선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질 여행의 종말
오로지 한 알의 모래인 세계가
무수히 많은 한 알의 모래들을 받아내는 참혹과 맞닥뜨릴 뿐

미지는 벌써 제 하반신을 모래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좁고 긴 도시의 병목을
안간힘으로 빠져나갔다 해도 결국은 다시 사막으로 되돌려지는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모래알 같은 열망이 시간에 금을 낼 수 있을까만

처음의 그곳으로 되돌아온 무수한 한 알의 모래들
한 알의 모래로 시작하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상반신을 바람에 날려버린 행상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 '모래시계' 전문


말도, 사람도, 길도 낯선 시인은 "광주에는 아는 길이 없어 물어서"(이하 '광주에는 극락강이 있다') 다니는데, "경상도 말로 길을 묻는 것이/ 거시기할 때도 있다"는 심정을 토로한다. 광주에 살기 전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구 시청 가는 길을 알고 충장로", 5·18묘지를 알고 있는(가봤을 수 있는) 시인은 광주에서 "경상도 말로 길"을 물으면 왜 거시기한지 알 수 없지만, 5·18을 몸으로 겪은 광주 시민들은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 차이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낯선 땅 광주는 경상도 출신 시인이 정착해 살기 쉽지 않은 곳이며, 이는 고스란히 시로 승화됐다.

시 '모래시계'도 그중 한 편이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줄 알았지만 결국 공간만 다를 뿐 똑같은 세상이라는 것. 삶에 서걱거리다가, 쿨럭이다가, 헛기침을 하다가 "더 이상 무너지지도 깨어지지도" 않을 곳을 찾아 홀로 여행을 떠나 정착했지만 "세계는 모두 하나의 유리 감옥"일 뿐이다. 아니 "오로지 한 알의 모래인 세계가/ 무수히 많은 한 알의 모래들을 받아내는 참혹"한 환경이다. "좁고 긴 도시의 병목"을 간신히 빠져나가도 "다시 사막으로 되돌려지는" 딱한 현실이지만 시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모래알 같은 열망"으로 시시포스의 형벌 혹은 컨베이어벨트 위의 부품들 같은 시간과 현실에서 벗어나려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이성목 시의 도전정신과 저항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밤새 나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깨어나지 않을 참입니다 바람대로라면 당신 혓바닥에 올려놓을 얇은 꽃잎 한 장이지만 나는 나를 두드리는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전생에 그는 나를 오래 두드려 새파란 낫을 건져갔던 사람입니다 낫에 잘린 꽃들을 애도하기에 늦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피 냄새나는 꽃들의 후생으로 내가 가서 어떤 날끝에도 잘리지 않는 꽃잎 한 장 세상에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다시 두렵습니다 두려워 지금도 불을 견디고 망치질을 견딥니다 한때는 저 소리에 깨어난 쇠스랑이 하루 만에 손가락이 잘려 돌아온 걸 보았습니다 이빨이 다 망가진 도끼도 보았습니다 늙어 고부라진 꼬챙이도 있었지만 아무도 원했던 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용광로 속에서 전생의 기억을 다 지우고 내 곁에 누워 있는 지금 번번이 잠들고 번번이 깨어나는 아침이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쇠붙이로 가득 찬 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깨어나지 않을 참이지만 대장장이는 내 속에서 무엇을 건져냈을까요 아 억겁이 쇠의 굴레라지만
- '대장간 칼' 전문


이성목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사물의 입장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다. 내가 사물이 되어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묘사한다. 단지 묘사만 하는 게 아니라 시인이 처한 현실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물의 입과 귀와 생각을 대변하므로 자연스럽게 우화를 차용한다. 시 '대장간 칼'이 대표적이다. 이 시의 화자는 연장이 되기 전 뜨겁게 달궈진 쇠다. 그 쇠는 전에 낫이었다. 낫이었을 때 꽃을 벤, "피 냄새나는 꽃들의 후생"을 기억하고 있는 쇠는 다시 낫으로 태어나지 않기 위해 격렬히 저항한다. "아무도 원했던 생은 아니었"지만 연장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몸이 망가지도록 일을 하다가 대장간으로 되돌아온다. 그들은 다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용광로 속에서 전생의 기억을 다 지우고" 낫·쇠스랑·도끼·꼬챙이 등으로 환생한다. 자율의지를 상실한 삶의 반복, 벗어날 수 없는 억겁의 굴레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검은 동굴 속 붉은 짐승을 가두었다 입구를 막아두자 짐승은 침에 몸을 적시며 고요해졌다 축축한 벽을 비비며 꿈틀거리던 짐승은 동굴보다 먼저 늙어 동굴의 귀신이 되었다 털 한 올 없는 붉은 살덩어리 귀신이 배를 바닥에 대고 물방울처럼 부화하는 소리의 유충들을 핥아주었다 소리는 자라서 동굴의 생각 동굴의 어둠 동굴의 웅얼거림을 몸으로 받아 침묵이 되고 말이 되고 언어가 되고 물컹거리고 투명해지고 어두워졌다 동굴이 열릴 때마다 붉은 짐승이 뱉어낸 말은 일제히 제 몸을 부풀리며 세상 속으로 흩어졌다 말이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때로는 저희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로 동굴의 냄새 동굴의 언어 동굴의 표정이 번져갔다 사람들은 붉은 것을 제 입속에 집어넣고 다녔다 짐승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짐승이 길러낸 말들만 동굴을 찾아 소문처럼 세상을 들쑤시며 다녔다 오늘은 내가 가두었던 동굴 속 붉은 짐승 한 마리 떠돌이 말들의 기척에 욱, 뛰쳐나오려 했다
- '혀를 위한 우화' 전문


"오리의 혀에 뼈가 있는 거 아세요?"('뼈 울음'), "긴 칼이 혀를 가르는 것처럼"('유령일기'), "비명이 혀를 빼물고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백양사분소'), "혀는 두 개로 쪼개지고"('창세기'), "그는 입안의 혀보다 빨리 알아듣고 움직이는 자"('발치'), "물컹한 구름의 혀를 밟고 발을 내민다"('식스센스') 등과 같이 이번 시집에는 혀(말)에 관한 시가 많다. 그것은 글 서두에서 밝은 것처럼 시인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 '혀를 위한 우화'는 설화(舌禍)를 다루고 있다.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은 시인은 입을 굳게 다문다. 밖의 소리보다 내면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인다. "소리는 자라" "침묵이 되고 말이 되고 언어"가 된다. '물컹거리고 투명해지고 어두워"져 시로 흘러나온다.

이 시는 "동굴이 열릴 때마다"부터 시인의 내면이 아닌 말이 지닌 폭력성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말이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경악하며 웅성"거린다. "때로는 저희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슬퍼하고 경악"한 말들은 고스란히 시인에게 향한다. 소문의 속성이다. 하지만 시인은 끝내 침묵한다. "몇몇 아름다운 사람들"('시인의 말') 곁에서 "고요하게 세상의 어깨를 덮어주는"('함박눈이라는 슬픔') 시를 쓰던 시인은 조용히 읊조린다. "나는 이런 고요가 좋다"('아파트 9층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본디 시인이 지니고 있는 품성이다.

◇함박눈이라는 슬픔=이성목 지음. 달아실 펴냄. 152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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