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브랜드 아성 위협하는 'SPA'

# 지난 7일 찾아간 일본의 '명품쇼핑 1번지' 긴자 거리는 대체로 고즈넉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난히 붐벼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바로 SPA(제조·유통 일괄화 의류, 일명 패스트패션) 브랜드인 포에버21, H&M, 자라 매장이었다. 특히 이들 SPA브랜드가 들어선 자리는 예전엔 명품브랜드가 영업을 하다 떠난 곳이다. 바로 옆 명품 브랜드인 프라다와 랑방 매장의 한산한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 구찌, 프라다, 보테가베네타 등 명품 거리로 유명한 뉴욕 맨해튼의 피프스 애비뉴. 이 곳에 자라 유니클로 등 패스트 패션 매장이 늘고 있다. 이들 브랜드는 지역 부동산 시장에도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목이 좋은 49~59번가의 1평방피트당 평균 임대료는 금융위기가 한창 극심하던 2009년 당시 1400달러에서 지난해 말 2367달러로 훌쩍 뛰었다.


SPA 브랜드가 전 세계 패션시장을 휩쓸고 있다.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 마저도 SPA 브랜드의 무서운 성장세에 긴장하는 모습이다. 명품업계 한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명품브랜드들이 심기가 불편하다. 바로 패스트패션 브랜드 때문"이라고 말했다.

SPA 브랜드란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유통, 판매를 모두 한 회사가 일괄적으로 진행하는 브랜드를 말한다.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해 빠르게 신상품을 회전시키는 게 특징이라서 패스트 패션으로도 불린다.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유니클로, H&M, 자라, 포에버21, 갭 등이 있다.

명품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명품 브랜드 매출이 2370억달러(한화 약 274조원)로 추산되는데 SPA브랜드의 매출이 이미 비슷한 수준까지 왔다"며 "20년 역사에 불과한 SPA브랜드가 100~200년 역사의 럭셔리 브랜드를 추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품목에 따라선 명품의 10분의 1에서 100분의 1 가격 수준인 SPA브랜드가 그만큼 엄청난 매출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SPA 인기 끄는 이유는=전문가들은 SPA 브랜드가 성장하는 비결로 우선 '빠른 상품 회전율'을 꼽았다. 패션업계 한 전문가는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유행의 전파속도와 지속시간이 크게 단축됐다"며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비싸고 오래 입는 옷 보다는 싸면서도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옷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SPA 브랜드는 디자인에서 샘플 제작까지 24시간, 원단 구매까지 48시간이 걸린다. 제품 생산엔 최대 2주밖에 걸리지 않는다. 축구장 50개 규모의 본사 물류센터에서는 1시간당 6만벌의 의류에 가격표가 부착되고, 즉시 판매가 가능한 상태로 포장해 최대 40시간 안에 전 세계 매장으로 배송된다.

저렴한 가격과 감각적인 디자인도 인기의 한 배경이다. 그래서 젊은 층에 대한 집객 효과도 높다. 일본 긴자 거리의 포에버21 매장에서 만난 대학생 사토리(21)씨는 "막상 들르면 저렴한 가격 때문에 여러 벌을 사게 된다"며 "디자인도 자주 바뀌어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SPA 국내 시장도 점령=글로벌 '패션 공룡'은 명동과 강남역 등 이미 서울 시내 주요 상권들을 접수한 데 이어 최근에는 새로 오픈하는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 그리고 주요 상권까지 전 방위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매출도 급성장세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유니클로와 H&M, 자라 등 3대 SPA 업체의 국내시장 매출이 지난 5년 새 77% 늘어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05년 진출한 일본의 유니클로의 매출은 2006년 300억원에서 지난해는 2500억원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4000억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렇다 보니 백화점들도 SPA브랜드 모시기에 한창이다. 백화점 명품관 1층에 자리를 내주는가 하면 수수료를 명품과 같은 수준인 7~10%로 깎아주고 있다. 국내 브랜드 평균 입점 수수료가 25~38% 인 것을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대우다. 신세계백화점 인천점은 H&M과 함께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을 같은 건물, 같은 층에 배치했다.

최근 오픈한 백화점들은 SPA브랜드 한 두 개쯤은 필수로 입점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난 8월 신도림에 오픈한 디큐브시티는 노른자 위치인 지하 1층에서부터 지상 3층까지 글로벌 SPA 브랜드로 매장을 채웠다.

◇ 국내브랜드 좁아지는 입지= 명품과 SPA 브랜드의 양자 대결구도 속에서 국내브랜드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국내기업들은 앞다퉈 해외브랜드를 수입하거나 자체브랜드를 SPA브랜드로 변신시키키는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의류업체 코데즈컴바인은 패스트 패션에 아웃도어 스타일을 결합한 캐주얼 의류를 선보였다. 이랜드그룹은 한국형 유니클로 '스파오'를, LG패션은 TNGT에 패스트 패션 상품군을 추가했다. 하지만 글로벌 트렌드와 맞물린 시장반응은 아직은 싸늘하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세계적 유통망을 가진 패스트패션 업체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상당한 약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높은 백화점 입점 수수료도 (국내브랜드에게) 부담으로 작용해 가격경쟁력이 낮아질 수 밖 에 없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SPA와 명품의 인기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많은 SPA브랜드가 국내상륙을 준비 중이라는 점이다. 자라를 보유한 스페인 인디텍스그룹의 버쉬카,풀앤베어,스트라디바리우스 등 3개 SPA가 지난달 동시 영업 개시에 나선 데 이어 스페인, 미국, 영국 등 새로운 SPA가 론칭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패션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패션업체들도 디자인에 집중해야 SPA 브랜드에 맞설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SPA의 핵심 경쟁력은 우수한 디자인"이라며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디자인에 집중해야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바로 옆에 있는 중국시장만 바라본다면 경쟁력을 키우기 어렵다"며 "연 20조원 매출의 H&M이나 18조원의 인디텍스처럼 미국, 유럽 등 패션의 본고장으로 진출해 진검승부를 펼쳐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