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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진의 증권반세기] "여윳돈 놀리느니 증권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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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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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3) 인생을 바꾼 한마디

[편집자주]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일제강점기에 자본시장 역할을 해온 조선증권취인소는 1946년 1월 미군정에 의해 해산된 후 10년 만인 1956년 3월3일 서울 명동에 새로 문을 열었다. 이로써 서울 증권시장이 정식으로 개장했다. 사진은 증권거래소 개설 후 격탁을 쳐서 첫 매매를 알리는 모습.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일제강점기에 자본시장 역할을 해온 조선증권취인소는 1946년 1월 미군정에 의해 해산된 후 10년 만인 1956년 3월3일 서울 명동에 새로 문을 열었다. 이로써 서울 증권시장이 정식으로 개장했다. 사진은 증권거래소 개설 후 격탁을 쳐서 첫 매매를 알리는 모습.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나에게는 내놓고 자랑할 만한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대단한 가업이나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나이로 여든여덟이 된 지금까지 그저 묵묵히 열심히 살아왔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시련과 행운도 많았지만 지나온 나날들을 돌아보면 역시 한 인간의 인생에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내가 증권시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7년 여름 무렵이다. 그때 나는 동아건설 경리부장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최준문 사장이 오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강 부장, 증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지금 회사 자금사정도 괜찮을 텐데 그냥 놀려두느니 증권을 사보는 게 어때?" 최 사장의 말처럼 나는 그때까지도 증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 한 마디가 내 인생행로를 뒤바꿔 놓으리라고는 이때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신(神)만이 안다고 하지만 이 시점부터 나는 평생 몸 담게 될 증권업계로 한발한발 다가가게 된 것이다.

휴전된 해 동아건설 경리부에 취업…사장 지시로 회사자금 증권 첫 투자
'건국국채' 원금상환+이자지급 매력…시세차익 합쳐 연 40% 고수익 올려


나는 1927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 210번지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호적상 생일은 12월30일로 돼 있지만 정확히 내가 태어난 날은 음력 9월30일이다. 대지주는 안 돼도 중농 정도의 집안이라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는 편이었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 논어, 통감을 떼고 신암소학교로 진학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로 올라와 경성상공학교에 진학했는데, 서울로 출가한 셋째 누이의 집에서 흑석동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했다.

당시 경성상공학교는 3년제로 상과와 공과가 있었고, 내가 공부한 상과에서는 주산과 부기 같은 실무 지식을 주로 가르쳤다. 한 학년은 200명 정도로 절반 정도가 일본인이었지만 성적은 늘 조선인 학생들이 더 좋았다. 나는 재학 중 내내 전교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으니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한 것 같다. 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성적 순으로 직장을 배정해 주었는데, 내가 배정받은 곳은 지금의 농협 전신인 금융조합이었다.

고향 예산에서 가까운 아산의 선장금융조합이 내가 근무한 첫 직장이다. 선장금융조합이라고는 했지만 실은 도고면에 위치해 집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출근길 중간에 삽교천이 있어서 강을 건너가야 했는데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비가 내려 물이 차면 도보로는 건널 수가 없어 주로 자전거를 타고 멀리 돌아서 출퇴근했다.

처음 출근한 게 해방되기 한 해 전인 1944년이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고 2년쯤 더 다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상경해 성균관대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초대 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특별 배려 입학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예과 2년을 마친 다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고 나중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전쟁기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공주로 피란을 가기도 했는데, 피란길이 막히는 바람에 다시 올라와 집에 숨어있었다. 그러다 지주 집안이라서 그랬는지 인민군에게 붙들려 보름 넘게 내무서에 갇혀 있기도 했고 서울 수복 때까지 꽤 고생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동란의 와중에 결혼도 하고 아들까지 태어났다.

그리고 휴전된 해 처음으로 최준문 사장을 만났다. 당시 동아건설은 충남토건사라는 이름으로 대전에 본사를 뒀는데, 1953년 봄부터 대천 방조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아건설에서 근무하던 이광우씨가 대천 방조제 현장의 경리과장으로 나를 추천한 것이다. 방조제 사업이 끝나고 1956년 동아건설이 본사를 서울 서소문동으로 옮겼는데, 나도 함께 상경해 경리부장을 맡게 됐다.

최 사장은 토목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뚝심 있게 밀고나가는 성격이었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안 맡기고 전부 자기 지휘 아래 일을 추진해나갔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도 아주 센 스타일이었다. 그런 만큼 나에게 회사의 여유자금 운용까지 맡긴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동명증권을 인수한 다음까지도 나에게 증권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일임한 것을 보면 나를 무척 신뢰한 것 같다.

1956년 3월3일 서울 명동에 새로 문을 연 대한증권거래소 개소식 장면.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1956년 3월3일 서울 명동에 새로 문을 연 대한증권거래소 개소식 장면.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아무튼 사장이 여유자금으로 증권을 사보라고 했으니 그쪽 분야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우선 소개를 받아 정화증권의 이창후 전무를 찾아갔다. 증권을 샀으면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전무는 국채를 사는 게 좋다고 말해주었다. 건국국채에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건국국채는 증권시장 전체 거래액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건국국채는 1950년 1월 처음 발행되기 시작해 1963년 제17회에 이르기까지 모두 99억5000만원 규모가 발행됐는데, 이전까지 증권 거래의 주종이었던 지가증권에 비해 안정성과 수익성, 유동성이 모두 좋아 투자대상으로 적격이었다. 상환기간도 비교적 장기인 데다 계속 발행할 가능성이 높아 시장이 넓었고, 요즘 상장주식처럼 등록하기만 하면 도난이나 분실 우려도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원금상환과 이자지급이 보장되고, 정부의 입찰보증금이나 계약보증금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전무가 권한 것처럼 그 무렵 건국국채에 투자해서 돈을 버는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당시 건국국채의 발행조건은 발행할 때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1957년 3월에 발행된 제10회 건국국채부터는 거의 일정해 이자율은 연 5%, 원금은 3년거치 후 매년 20%씩 분할상환하도록 돼 있었다.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1950년에 발행된 제1회 건국국채.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1950년에 발행된 제1회 건국국채.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그러면 새로 발행된 제11회 건국국채에 투자한다고 치자. 처음 거래되는 건국국채는 상환기간이 제일 길기 때문에 유통가격은 액면의 20%선에 불과했다. 액면 1000환짜리 제11회 건국국채를 200환이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국채를 1년간 보유하면 이자로 50환을 받는다. 게다가 1년이 지나면 상환기일이 다가왔으므로 유통가격도 액면의 25%인 250환 수준으로 오른다. 그러니까 건국국채를 1년간 보유하면 이자로 50환, 시세차익으로 50환, 도합 100환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처음 투자한 금액이 200환이었으니 연 수익률이 50%인 셈이다.

거래규모 늘어나니 위탁수수료 부담…과감히 증권사 인수해 직접 경영 나서
동명證 출범 1년도 안돼 약정고 1위…"서른둘에 발들여 평생 증권인으로"


물론 연 50%의 수익률은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당시 내가 회사 여유자금을 국채에 투자해 거둔 수익률은 연 35~40%쯤 된 것 같다. 이 정도로도 수입이 워낙 좋은 편이어서 회사에 큰 도움이 됐고 나 역시 경리업무보다 증권투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거래규모가 점차 커지다보니 매매도 빈번해지고 증권회사에 지급하는 위탁수수료도 만만치 않은 금액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막대한 금액을 수수료로 지불하느니 증권회사를 하나 인수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최 사장도 동의했다.

이때가 1958년 10월 무렵이었는데 당시 명동에는 1956년 3월 증권거래소 개설을 전후해 불었던 증권회사 설립 붐으로 43개사가 난립했다. 게다가 1957년과 58년 2차례 발생한 국채 파동 여파로 여러 증권회사가 경영난을 겪었다. 마침 조선방직과 동화백화점의 사주였던 강일매씨가 흥일증권을 팔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강일매 사장을 찾아가 직접 인수계약을 했다. 그리고 1958년 10월15일 동명증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이날부터 동아건설 경리부장에서 동명증권 상무가 됐다. 그러니까 우리 나이 서른둘에 명실상부한 증권인이 되어 지금까지 외도 한 번 없이 증권업계와 평생을 지내게 된 것이다. 최 사장은 동명증권 사장으로 이름만 올려놓고 회사 경영은 상무인 나에게 완전히 맡겼다.

나는 이제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고객, 즉 남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위치가 됐다. 어제까지 증권회사 고객이던 내가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으로 180도 바뀐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고객을 많이 확보하고 고객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밤잠을 설쳐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낮에는 정말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덕분에 동명증권은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 돼 약정고 순위 1위에 올랐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늘 이렇게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었다.
(4회는 '증권가의 풍운아 윤응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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