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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진의 증권반세기] 바람 잘 날 없는 증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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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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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8) 파동과 휴장의 연속

[편집자주]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데모·난동에 거래소 점거까지…1년새 4차례나 장기 휴장

1962년 잇따른 증권파동의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증권업계 대책회의 모습. 가운데 일어선 이가 송대순 당시 증권업협회장.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1962년 잇따른 증권파동의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증권업계 대책회의 모습. 가운데 일어선 이가 송대순 당시 증권업협회장.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19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 증권시장을 되돌아보면 규모나 제도, 거래 방식 등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초라했다. 마치 영세상인들이 길거리에서 좌판을 놓고 장사하듯 증권거래는 그야말로 원시적이었다. 그러나 증권시장은 처음부터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증권시장이란 어느 나라에서든 태동기와 학습기, 성숙기 같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차근차근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권시장은 어느 날 불쑥 다 큰 형태를 갖추고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도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나는 게 아니라 광풍과도 같은 투기와 파동, 투자자들의 소란과 난동을 몰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투자자 시위로 열린 증권 '야시장' 거래소…현금 확보 위해 자기 주식 매각 나서자
주가 폭락 부추긴다며 이사장실 점거 소동…심야에 시장 다시 열어 반대 매매해 겨우 수습


1964년 3월3일 내가 삼보증권을 인수했을 무렵의 명동 증권가는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크고 작은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증권시장이 휴장했고, 주가가 급락하기라도 하면 투자자들이 데모를 하고 난동을 피웠다. 청산거래 제도를 이용한 차금 챙기기식 책동전(策動戰)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고, 결제자금을 납부하지 않아 시장이 마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세상에 증권시장이 걸핏하면 휴장하다니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로 그랬다. 1962년의 경우를 보자. 6월1일부터 6일까지는 5월 증권파동으로 인한 결제불이행 사태로, 6월11일부터 7월12일까지는 긴급 통화조치에 따른 화폐 개혁으로, 8월31일부터 9월3일까지는 태양증권의 정산차금 및 증거금 납부 거부 사태로, 12월4일부터 17일까지는 제2파동의 여파로 잇따라 휴장했다.

1963년 들어서도 5월 파동의 진원이었던 대증주(大證株)가 2월25일 전장(前場)에서 1전9리까지 폭락하자 투자자들이 거래소 입회장까지 난입하는 바람에 무기한 휴장에 들어가 73일간이라는 증시 사상 최장기 휴장 기록을 세우고 5월9일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이밖에도 책동전 수습을 위해서 혹은 투자자들의 소란으로 인해 전장과 후장 입회를 중단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이처럼 증권시장이 자주 문을 닫다 보니 장기 휴장에 들어가기 전 매매했던 주식의 결제가 말썽이 돼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증권회사들의 영업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2년 최대 60개사에 달한 증권회사가 적자로 인해 하나씩 문을 닫으며 1년 만에 41개로 줄어들었다. 1962년 증권거래법 제정에 따라 주식회사체제로 출범한 대한증권거래소도 불과 1년 만인 1963년 5월 공영제로 다시 개편하며 한국증권거래소로 바뀌었고, 대증주는 한증권(韓證券, 한국증권거래소 출자증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거래소체제가 영단제에서 주식회사로, 다시 공영제로 바뀌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었다.

1964년에는 투자자들의 난동으로 인해 주간에 체결된 거래를 야간에 반대매매로 취소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러니까 그 해 봄 연일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벌어진 시절이었는데 3월24일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여 서울시내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3월27일 증권거래소가 보유하고 있던 한증권과 증금주를 부국증권과 한흥증권을 통해 매각한 것이었다.

박승준 당시 증권거래소 이사장 입장에서는 직원들 월급 줄 돈마저 부족하다 보니 현금 확보를 위해 자기주식을 내다 판 것이었는데, 투자자들은 온 나라가 비상사태에 빠져 증시가 폭락을 거듭하는 상황에 거래소마저 대규모 매물을 내놓았다며 난리를 피운 것이었다. 결국 이날 오후 수백 명의 투자자들이 거래소로 몰려들어 이사장실에까지 난입해 집기와 기물을 다 부숴버렸다.

영단제에서 주식회사체제로 바뀐 지 1년 만에 다시 공영제로 출범한 한국증권거래소는 1963년 5월3일 개소식을 가졌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영단제에서 주식회사체제로 바뀐 지 1년 만에 다시 공영제로 출범한 한국증권거래소는 1963년 5월3일 개소식을 가졌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이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 대표로 거래소에 나갔는데, 성난 군중들과 시장대리인,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투자자들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이날 거래소가 매도한 한증권과 증금주를 반대매매를 통해 환수하고, 박 이사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퇴진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정규 개장시간이 끝난 시각에 참으로 난감한 요구였다.

결국 송대순 당시 증권업협회장이 단상에 올라가 "내가 책임지고 박 이사장을 퇴진시키고 한증권과 증금주를 반대매매하겠다"고 설득해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밤늦게 증권 '야시장'(夜市場)이 열렸고 거래소는 정규시간에 판 주식을 반대매매로 다시 사들였다. 박 이사장은 다음날 사표를 던졌다.

내가 삼보증권을 인수했을 무렵의 명동 증권가 풍경은 이런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는 밤낮없이 부지런히 뛰었다. 당시 직원이라고 해봐야 사환으로 일하던 여직원을 포함해 14~15명이 전부였지만 이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과거 동명증권 시절에는 동아건설의 자기 매매 물량이 워낙 많아 큰 힘이 됐지만 이제는 그런 도움도 바랄 수 없었다. 마라톤 선수처럼 오로지 내 발로 열심히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삼보증권 인수 1년만에 업계 1위로 올려놔, 회사 이름 안바꾸고 그대로…마크도 직접 고안
신뢰 쌓았던 고객들 다시 찾아준 게 1등 비결… "냉정하게 대처하면 증권 파동에도 손해 안봐"


그렇게 해서 내가 인수하기 전까지 업계에서 중위권에 머물던 삼보증권의 영업실적은 인수 1년 만에 1등으로 올라섰다. 아마도 그 비결은 예전부터 나와 거래해온 고객들의 믿음 덕분이었던 것 같다.

한 예로 5월 파동 직전 대증주에 엄청난 프리미엄을 붙여 공모할 때도 나는 청약하려는 고객들을 붙잡고 대놓고 말리지는 못했지만 프리미엄이 너무 높다고는 말해주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청약만 하면 금방 떼돈을 벌 것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너무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동명증권 전무로 사실상 증권회사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 청약을 권유하기는커녕 냉정하게 생각해보라고 했으니 눈치 빠른 고객들은 금세 내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실 이런저런 증권파동이 일어나면 많은 투자자들이 손해를 보지만 그 와중에 돈을 버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월가 속담에 '구두닦이가 주식을 사기 시작하면 상투'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사람들이 소 팔아 주식 사면 상투'라고 했다. 너도나도 주식 사겠다고 덤벼들면 팔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떠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증권시장에서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이겠지만, 여하튼 그런 식으로 나와 인연을 맺은 개인고객들이 다시 삼보증권을 찾아주었던 것이다.

삼보증권 인수 후 한동안은 을지로 입구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 맞은편의 오양빌딩 옆 삼정빌딩 2층 40평 남짓한 사무실을 썼는데 얼마 후 흥사단 본부가 있던 명동의 대성빌딩으로 이사했다.

그 무렵 새로 증권회사를 인수하면 제일 먼저 회사 이름부터 바꾸는 게 통례였다. 회사 대표가 바뀌는 데다 당시 피인수 회사들은 대개 창구사고를 내거나 해서 이미지가 별로 안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보증권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또 삼보(三寶)라는 단어는 불교도의 세 가지 근본 귀의처인 불(佛) 법(法) 승(僧)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교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을 상징했다. 나 자신도 불교신자지만 아내는 북한산에 작은 절을 창건했을 정도로 불심이 아주 대단해 굳이 회사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삼보증권이라는 사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강성진의 증권반세기] 바람 잘 날 없는 증권가
여담이지만 나중에 삼보증권의 마크(사진)도 내가 직접 고안했는데, 삼보(Sambo)와 증권(Securities)을 뜻하는 대문자 S자 안에 금강(金剛)을 의미하는 다이아몬드를 그려 넣고, 그 속에 세 가지 보물을 상징하는 삼(三)자를 새겨 넣었다. 그 시절 다른 증권회사에서는 회사 마크 따위는 생각도 못할 때였지만 우리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공모했고, 나도 밤을 새워 만든 작품을 응모했다. 사장이 제출한 것이라 그랬는지 심사위원들이 내가 만든 회사 마크가 좋다고 해서 그것으로 최종 결정했는데, 어쨌든 그 밑바탕에는 이런 불심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삼보증권 인수 후 정말 열심히 영업을 해나갔다. 하지만 각종 증권파동과 잇단 증시휴장사태, 투자자들의 난동과 시위 같은 어지러운 환경이 이어지는 한 증권시장은 침체의 수렁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여기에 소위 증권가의 큰손과 증권회사들이 책동전까지 벌이는 바람에 시장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해동화재 주식을 둘러싼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졌으니 삼보증권을 인수해 겨우 자리도 잡기 전인 1964년 7월의 일이었다. (9회 '해동화재주 책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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