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속보
통합검색

[경제신춘문예 대상]팬티M

머니투데이
  • 조은필(조선수)
  • VIEW 15,263
  • 2016.01.01 04:0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 문자
  • 글자크기조절
  • 댓글···

[제11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조은필(본명 조선수) / 소설

image
“요람에서 무덤까지, 언제나 속옷을 먼저 생각하라.”
베르톨트 브레이트(1898-1956)

지하도 계단을 오르며 보일 듯 말 듯한 여자들의 뒷모습을 보는 게 여간 아슬아슬하지 않다. 방금 전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닌데, 언뜻 앞서 가는 여자의 속옷 색깔이 드러난 것 같다. 살구색을 입으면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 텐데, 흐릿한 가운데 분홍색이 얼핏얼핏 내비친다. 매일 접하는 풍경이지만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브레히트의 말이 생각난다. 남자이고 극작가인 그가 저 말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한 것일까. 자신이 쓴 연극 대사 속에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배우들에게 일까. 언제 누구에겐가 들은 말인데, 한번 알아봐야지 하면서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풀리고 옷차림이 가벼워진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여자들 의상이 각양각색이다. 저 옷과 맞추려면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어떤 차림을 해야 될까, 잠시 직업적인 궁금증이 일었다.

자재과에 들러 지난 주 주문한 원단을 체크하고 검수를 하고 나니 벌써 퇴근시간이 지났다. 문득 양복 상의가 생각나 옆 건물에 있는 세탁소로 뛰어갔지만,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회사 근처에 세탁소가 있어 편하긴 하지만 미리미리 챙기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혹시나 하고 안을 기웃거리는데 팬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요요히 옷걸이에 걸려 있는 그건, 신데렐라 팬티였다. 100% 실크, 아이보리색 바탕에 분홍색 진주알이 아홉 개 박혀 있는 팬티는 몇 년 전 어느 속옷 메이커가 한정수량만 생산했다는 바로 그 제품 같았다. 일의 성격상 패션잡지 등을 많이 봐야만 하는데, 그런 잡지들 중 하나에서 분명히 본 것 같다. 신데렐라 팬티, 이름이 촌스럽기도 하여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데 어쩌면 제품 이름을 지을 때 그런 것도 감안했는지 모른다. 상표가 상품이고 돈이다. 어쨌거나 그때 잡지를 보며 이런 걸 사 입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걸 세탁소에 맡기는 사람이 있는 걸 보니 상품도 엄연히 존재하는가 보다.

“팬티를 저렇게 만들 수 있다니, 저런 팬티를 입고 있으면 남자가 불편할 것 같지 않냐?”
입사동기 인규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 내 뒤에서 같이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는 회사 영업부에 근무하는 친구였다.
“남자가 왜?”
“저걸 벗기느라.”
“저 팬티는 입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지.”
“요즘 나야말로 회사 그만두고 내가 직접 여자 속옷 사업을 해볼까 생각하는 중이다.”
“네가 직접 회사를 차려서?” 뜻밖의 말이라 다시 인규에게 물었다.
“회사 다니는 것도 재미없고 말이지. 회식 같은 자리에도 잘 빠지다 보니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 형편이 이렇다. 회사를 그만두고 뭔가 내 사업으로 새로운 걸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갖고 있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자 속옷이야. 너는 그쪽 디자인에 대해서도 잘 모르잖아. 그거야 말로 실용성보다는 디자인이 생명인데.”
“사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속옷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하거든. 그 사람도 요즘 뭔가 새로운 걸 하나 하고 싶어 하고.”

나도 마음속으로 창업을 꿈꾸고 있던 중이었다. 남자 옷 메이커 디자인실에 근무하고 있지만 내게 남다른 창의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다. 단지 내가 디자인한 옷이 완성돼 출시되는 걸 보면 뿌듯할 따름이다. 인규가 그 말을 하기 전 몇 달째, 퇴근 후에 할 수 있는 세컨잡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어떤 직종을 택해야 내게 가장 맞을지, 수익성이 있을지,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회사 내의 자금담당으로 있는 친구가 이야기해준 바에 따르면, 사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여러 사정으로 위태위태하다고 했다.

나는 내년쯤에는 결혼할 작정이었다. 서른다섯 나이에 18평짜리 오피스텔 하나, 그렇지만 명의만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셈이어서 매달 적지 않은 돈을 갚아나가야 하는 상태다. 서로 좋아하면 그보다 좁은 오피스텔에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성희는 그렇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그녀는 자꾸만 결혼식을 미루고 있었다. 그녀와 만난 지 2년이 돼 가는데, 결혼을 전제로 한 뒤부터 차츰 사이가 미적지근해지는 것 같다. 부모님은 도와줄 터이니 결혼하라고 말하지만, 아직 동생 둘이 공부하고 있고 그 둘을 뒷바라지하는 것 만으로도 아버지는 힘에 부칠 것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심란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삼 년이 지난 뒤였을까. 아버지는 마당가에 다시 여자 옷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종이처럼 구겨진 얼굴을 조금씩 펴기 시작했다. 어딘가 편해진 것도 같고 부드러워진 것도 같았다. 가끔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새 엄마는 엄마보다 얼굴이 참 예뻤다. 내가 열다섯 살 때였다. 앞마당에 목련이 한창이던 사월 어느 날, 새 엄마가 왔다. 새 엄마는 종일 손을 움직였다.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팥칼국수에서 카스텔라까지, 학교에 갔다 오면 언제나 새 엄마가 만든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녘에 목련꽃을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던 무렵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빨랫줄에 걸린 여자 옷을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전에는 빨랫줄에 남자 옷만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인규가 자신의 새 사업 파트너라고 소개한 박수진 씨와 함께 내 오피스텔 앞으로 찾아왔다. 그간 서로 모르고 있었지만, 박수진 씨는 원래 우리 회사에 다니다 다른 회사로 간 직원이었다.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로 차차 봉제공장이 옮겨지던 때였다. 봉제파트를 책임지고 맡아줄 여성 관리자가 필요했던 현지 공장에서 높은 월급으로 박수진 씨를 스카우트했던 것인데, 캄보디아로 나간 지 2년 만에 그녀는 되돌아왔다. 등에 대상포진이 가득 번진 채였다. 처음 보는 내 앞에서 울먹이며 박수진 씨는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박수진 씨의 얼굴은 조금 긴 편이다. 눈은 순하게 생겼는데, 입매는 고집스러워 보인다.

셋이 작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다가 지금 하는 일이 매일 똑같아서 재미가 없다고 입을 모았고, 경제적으로도 앞날을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새로 인터넷쇼핑몰을 창업하자는 말이 나왔다. 사실은 인규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와서 한 말이었다. 인규는 강남으로 집을 옮기고 싶어 했다. 박수진 씨는 얹혀사는 언니 집에서 독립하고자 했다. 나는 매달 내는 이자 외에 오피스텔 살 때 은행에서 빌렸던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동업자로 여건이 딱 맞았다.

박수진 씨는 우리가 새로 하는 일 역시 꼭 옷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것이 옷이었고, 원단이었다. 낭만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가능한 우리 일에 대해 낭만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힘들어도 옷은 입고 살아야 되니까.”
“그 중에서도 팬티는 안 입을 순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옷을 만드는 일 중에서도 팬티를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고.”
“그래. 불황일수록 미니스커트가 호황을 누리니까. 옷 중에서도 가장 원단이 적게 들고, 봉제할 거리가 많지 않은 게 여자팬티이지.”
말장난 비슷하게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말하다가, 마지막으로 서로 진지한 의견을 주고받을 때에도 우리는 셋 다 여자 팬티를 만들자는 데는 의견이 같았고, 그것도 대량생산이 아닌 소량으로 수제팬티를 만들자는 거였다.
“그래. 주문자가 원하면 팬티에 이름도 넣어주는 거야.”
“남녀 파트너 간의 기념일 같은 때는 주문자가 원하는 걸 최대한 수렴해서 특색 있게 만들어주는 거지.”
“기본스타일의 팬티를 이용해서 거기에 사진이나 사인 같은 걸 넣어주는 건 어떨까?”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만들든 디자인과 봉제가 관건이고 거기에 영업적인 수완이 따라준다면 우리 셋이 의기투합해 만드는 쇼핑몰 역시 잘 될 것이다. 자못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그러나 남자 정장을 취급하다가 세컨잡 비슷하게 참여한다지만 처음 취급하고 생산하는 제품이 여자 팬티라니! 여자 옷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데 내가 함께하기에는 다소 무리일 것 같아 처음 장난기를 담아 동조할 때와는 달리 뒤로 빠지려고 했다. 그러자 박수진 씨가 내 말을 반박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지호 씨 같은 사람이 적임자인 거예요. 세상에 널린 게 여자 옷이고 여자 팬티인데, 정말로 초보자의 순수한 시각이 필요한 거라고요. 두고 보세요.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라구요. 나나 인규 씨도 장난으로 이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고.”

우선은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와 창업하는 것이 아니라 당분간은 그걸 세컨잡으로 삼다가 어느 시기 본격적으로 독립하여 나서자고 했다. 여자 옷 만드는 것을, 그것도 회사 제품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여자 속옷을 세컨잡으로 한다면 혹시 중간에 회사에서 누군가 알게 되더라도 크게 미안해할 일도 없을뿐더러, 팬티를 만들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팔면 자금 면에서도 그다지 큰 위험부담은 없을 거라고 인규가 말했다.

인규보다 더 추진력 있는 쪽이 박수진 씨였다. 이제 뭔가 자기가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인규와 함께 모든 일들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한 말 그대로였다. 나는 디자인, 박수진 씨는 봉제파트, 인규는 자금과 영업을 각자 도맡기로 하였다. 상품의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한 쇼핑몰 이름도 의견에 의견을 거듭해 정했다. 처음엔 ‘팬티나라’가 우세했지만 다소 희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최종적으로 팬티와 미디엄 사이즈를 결합해, ‘팬티M’이라 정했다.

그 다음 일들은 일사천리였다. 거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대략 정해진 순서대로, 그리고 저마다 맡은 분야에서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무리 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디자인에서 남자 정장과 여자 팬티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어쩌면 극과 극일 수도 있지만- 평소 내가 일하는 버릇대로 이런저런 검색을 한 후 노트북에 팬티를 만드는 과정과 기타 필요한 사항을 적어보았다.

먼저 스케치를 한다. 옷감의 종류와 색깔, 부자재 등을 정한다. 스케치에 따라 패턴을 뜨고 커팅을 한다. 봉제를 하고, 라벨을 달고, 실밥을 정리하고, 다림질한 후 상품을 포장한다. 처음 접하는 옷감일 땐 만들어서 한 번 물에 빤 다음에 패턴을 수정해 규격을 맞춘다. 물세탁을 한 후, 수축과 팽창에 맞춰 패턴을 보정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미싱도 세 종류의 것을 갖추어야 한다. 싱글 니들 미싱, 흔히 삼봉 머신이라고 불리는 카버 스티치 미싱, 그리고 오버로크 미싱. 오버로크 미싱은 옆선을 잡아주고 원단이 안 풀리게 마감해준다. 봉제한 후에 제대로 늘어나야 입었을 때 팬티가 터지지 않는다. 그밖에 재단기, 스팀다리미와 자수 기계가 필요하다.

각자 투자한 것을 나누어 계산해보니 내가 투자한 것이 3000만 원, 박수진 씨가 3000만 원, 인규가 수치상으로 4500만 원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인규가 7분의 3, 박수진씨가 7분의 2, 내가 7분의 2 비율이다. 물론 인규의 지분 중에는 다달이 그가 내는 오피스텔 임대료 일정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피스텔 관리비도 일정부분 우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팬티M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미싱은 임대해서 쓰고, 세탁기는 인규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도 모두 인규의 투자 몫으로 계산했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경비를 절감하는 차원에서 인규의 오피스텔을 이용하기로 하였는데, 박수진 씨가 오피스텔로 출근해 봉제를 맡아서 하고, 인규와 나는 퇴근 후 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들르거나 각자 시간을 내 일을 하기로 했다.

팬티를 만들어 인터넷쇼핑몰에서 팔겠다고 하자, “사내자식이 뭐 할 일이 없어 여자 팬티를 만들어? 보다 큰 걸 만들지.” 하고 주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큰 거 어떤 거?” 하고 묻자 대학 동기 중 한 사람은 “이왕이면 팬텀기 같은 무기 말이야.” 하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디자이너는 정히 할 요량이면 “너는 여자를 잘 모르니 남자 팬티를 하는 게 낫지 않나?” 하고 충고했다.

사람들은 정말 뭘 모른다. 이건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속옷 사업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남자는 여자만큼 속옷에 관심이 없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패션은 여자의 숙명이다. 이브의 나뭇잎에서 비롯된 숨기고 싶고 보이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랄까. 비록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공동사업이긴 하지만 나는 새로 시작한 이 아이템에 승부를 걸고 싶었다. 이 일을 잘 해내면 앞날이 환하게 열릴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생산되고 있는 모든 제품에 이런저런 인류사적 의미가 있겠지만, 팬티야말로, 특히 여자 팬티야말로 일반 공장에서 생산하는 보통의 공산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누구에게나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이리라. 첫날밤에, 혹은 의미 있는 어떤 날에 아버지가 엄마 팬티 속으로 들어간 이후 우리가 태어난 것이다. 이 정도면 이건 팬티가 사업 아이템이나 하나의 공산품, 또는 생필품 단계를 넘어 인류의 미래 문제에까지 접근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온통 팬티로 인해 빚어진 것 같다. 이브가 걸쳤던 나뭇잎 팬티로 인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누가 누구의 것을 벗기거나, 스스로 벗거나, 사람의 하루는, 또 인류의 역사는 이것에서 비롯된다.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나는 팬티에 대한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제품을 디자인할 때뿐 아니라 하루의 모든 일 중간에도 팬티의 의미, 팬티의 일상성 등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 생각도 모두 사업 아이템으로 연결되었다.

소량 생산인 만큼, 또 앞으로 다른 제품들과의 희귀성과 차별화를 생각해서라도 수작업으로 만드는 게 당연했다. 또 대량 생산하는 제품보다 하나하나 손을 거쳐 생산되는 핸드메이드 팬티가 살에 닿을 때에도 실제 감촉뿐 아니라 거기에 감성적으로 또 하나의 은밀한 촉감이 더해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제품에 대한 홍보적 문제이기도 했다. 아무리 소규모의 사업이라 해도, 특히나 속옷을 만들어 파는 사업에서 홍보만큼 은밀하며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밤새 팬티에 대한 스케치를 해댔다. 어쩌면 그걸로 자꾸만 어른거리는 환영을 구체적 형태의 그림으로 그려냄으로써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쯤 지상에서 사라져버렸을, 빨랫줄에 걸린 채 햇볕에 마르던 숱한 이 세상의 팬티들과 그것을 입고 있는 여자들에 대한 환상이 이미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규는 내가 원하는 부자재를 주문하거나 사다 나르고, 또 매일매일 주문량을 점검하고 판매액과 비용을 계산해내고, 그러는 틈틈이 박수진 씨를 도와 잔심부름을 하고, 가끔은 박수진 씨가 하라는 대로 가위질도 하며 열심히 자기 몫을 다하고 있었다. 박수진 씨가 지시하는 대로 실밥을 툭툭 뜯고 있는 그를 보면 저 사람이 회사 안에서 늘 놀기 좋아하던 그 친구가 맞나 신기할 정도였다.

팬티M에서 처음 만든 팬티는 속주머니 팬티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아이디어인데, 보통 이런 팬티는 남대문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팬티 안에 주머니를 덧대어 그 안에 비상금이나 중요한 메모 같은 것을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모양과 색상이 단순했다. 만 원에 두 장을 살 수 있는 저가품으로 우리는 우선 그걸 공략했다.

시장 상품들과는 첫눈에 차별화되도록 도안을 고급화하면서 나이든 주부들뿐만 아니라, 젊은 여자들도 해외여행 갈 때 구매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밑위길이를 줄이고 거기에 미니 포켓을 달았다. 누가 봐도 탐낼 정도로 예쁜 몽키 바나나를 형상화해서 팬티 안에 덧대었다.

'언제나 새로운 디자인.
디자인 하나에 10장만 한정 생산합니다.
결혼기념일이나 생일기념으로 사진을 넣어 만들 수도 있고
커플 세트도 가능합니다. 원하시면 이름도 예쁘게 새겨 드립니다.'

그런 광고 문안을 내걸고, 기본적인 스타일에 특이한 로고나 문양 등을 가미한 디자인을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남자는 아쉬운 대로 팬티 한 장으로 일주일을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는 다를 것이다. 같은 여자라도 솔로보다는 결혼한 여자와 애인 있는 여자들이 팬티에 관심이 더 많은 건 당연하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녀들은 자신의 속옷을 보여줄 남자가 있으니까. 하지만 어린 여자애들이 속옷을 보여줄 남자가 없어도, 팬티에 관심을 갖는 걸 보면 속옷이든 겉옷이든 옷은 여자의 숙명이다. 보여주는 것과 보는 것!

이브의 나뭇잎 한 장으로부터 비롯된 팬티. 나뭇잎 디자인을 잘 변형시키면 돈이 될 것 같았다. 여러 생각과 고심 끝에 쇼핑 사이트에 새로 올린 '허니문세트'가 반응이 좋았다. 보통 한 달에 두 번 새 디자인을 사이트에 올리곤 한다. 그게 나의 몫이었다.

누구나 팬티를 입는다. 돈이 많으면 좋은 팬티를 입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좀 더 나은 팬티를 입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물질이란 이런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보이는 것들도 중요하다. 팬티 역시 보일락 말락 하며 누구에겐가 보이는 세계의 것이다. “언제나 속옷을 먼저 생각하라.” 그럴 때면 브레히트의 말이 경구처럼 뇌리를 스친다.

박수진 씨는 미싱을 아주 잘 다뤘다. 그녀가 미싱을 만지면 금세 새가 만들어지고, 곰이 날아다녔다. 어쩜 그리 잘 만드는지, 그녀의 손작업에 놀랄 때가 많았는데 그것 역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미싱 자체 내에 입력되어 있는 도안이 상당수 있어서 그것을 활용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다고 박수진 씨가 말했다. 2년 동안의 캄보디아 공장생활이 박수진 씨에게 어떤 작용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확실히 인규와 나와는 달랐다. 팬티M 창업 초기 단계부터 무언가 자신감이 생긴 눈치다. 어쨌든 원단을 가지고 놀 때 그녀의 표정은 완전 몰입 그 자체였다. 일이 노동이자 동시에 유희일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미싱으로 보여주었다.

박수진 씨는 여자라서 여자들이 전화로 주문할 때 아무 부담 없이 상담했다. 체형에 대한 문의나 그밖에 사소한 것들. 팬티의 사이즈가 복잡해질수록 반품이 생길 여지가 많았다.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라 하더라도 너무 작거나 너무 큰 사이즈는 가능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박수진 씨가 말했다.

"왜?"하고 인규가 묻자 박수진 씨가 대답했다. “날씬하면 날씬한 대로 뭔가 헐렁한 느낌이 들어 반품할 확률이 높고, 뚱뚱하면 뚱뚱한 대로 무얼 입어도 성에 안 차 역시 반품할 확률이 높거든요.”

어쩌면 여자의 몸에 대해서는 여자인 박수진 씨가 더 잘 알지도 모른다. 박수 진씨의 사이즈가 딱 미디엄이었다. 팬티는 속옷인데, 어떻게 입어보고 그걸 반품하냐고 인규와 내가 반문했다가 핀잔만 잔뜩 들었다.

“생리대도 안 맞으면 반품할 수 있는 거죠.”

그 부분에 박수진 씨는 오히려 우리보다 쿨했다. 반품에 짜증을 내면서도 반품이야말로 소비자의 마지막 권리라고 말했다.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소비자야말로 모든 제품의 왕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왕들을 위한 독창적인 팬티를 개발하고 싶었다. 피부에 닿는 촉감이나 흡습성 등을 고려한다면 소재는 함부로 바꿀 수 없을 테지만, 디자인만 달리 하면 얼마든지 다양한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일단 정신이 없었다. 잘 만들고 싶었다. 주문이 떨어지면 7일 이내, 주문자가 원하는 대로 기본팬티를 변형하거나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보내겠다고 했다. 주문이 늘어날수록 그에 따른 디자인을 제때 만들어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새로운 걸 개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지금 사귀고 있는 성희와의 관계는 무덤덤해졌다.

사람들은 팬티M에서 제시한 기본스타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만큼 눈이 높기도 하고 까다로웠다. 어떤 제품의 경우, 주문생산 방식이라 더욱 그랬다. 실크와 레이온을 짜깁기하여 어렵사리 개발한 팬티는 4장 밖에 팔리지 않았다. 중앙부분을 망사로 처리하고 팬티라이너를 사용하기 쉽게 고안한 팬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디자인한 제품을 보고 거기에 자기 취향을 더하여 주문하는 방식과 형태가 제각각 다양했다.

‘남자친구랑 처음 한 방에 있게 될 것 같은데, 쉽게 벗겨지면서, 쉬워 보이지 않는 지퍼가 달린 팬티를 만들어 주세요.’

색다른 주문이 들어올수록 부담감이 생겼다. 매번 새로운 걸 만든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쇼핑몰 사이트로 주문하고 주문 받는 거니까 얼굴을 감춘 여자들(혹은 그녀의 남자들)의 주문이 대담했다. 딱 그 부분에 핏방울 무늬를 넣어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그런 주문을 받을 때는 이건 남자가 할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 디자이너인들 그런 주문 앞에 편한 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고심해서 스케치를 해봐도, 요술방망이처럼 뚝딱 머릿속에서 생각해내 손으로 즉시 만들어내는 박수진 씨의 기민성을 따라갈 순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선 장미가 피어나고 즉석에서 새로운 디자인이 나왔다. ‘그곳에 딱 핏방울’ 주문만 해도 그녀는 그곳에 바로 붉은 자수를 새겨 넣었다. 확실히 어떤 생각만으로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박수진 씨는 여자이고 나는 남자인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밤샘작업을 해도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감각의 차이. 똑같은 식재료를 가지고 식감이 다른 여러 종류의 음식들을 만들어내듯 그런 은밀한 주문의 팬티들이 박의 손끝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손끝에서 술술 팬티가 풀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영역이 흐릿해지는 듯해 그녀에게 미안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오로지 팬티 하나로, 그녀는 세상을 재단하고 박음질하고 포장하는 듯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자팬티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어요?”

신상품 개발 건으로 머리를 벽에 짓찧고 싶을 때 박수진 씨가 물었다.

“아니, 별 생각 없었는데요.”
“바로 그것 때문에 지호 씨가 막막해하는 거예요. 나는 알 것 같아요. 남자친구 없는 여자가 왜 그토록 화려한 팬티, 예쁜 팬티, 고가의 팬티를 원하는지. 여자들은 자가발전이 되는 듯해요. 자신 외에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맘에 드는 팬티를 입었을 때 느끼는 촉촉함이랄지 따스함이랄지 그 만족감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밤늦게 셋이 저녁을 먹던 중 인규가 다짜고짜 박수진 씨에게 물어봤다.

“너, T자 팬티 입어본 적 있어?”
“응.” 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땠어?”
“한번 입어보곤 불편해서 바로 벗었어.”
“안 입는 것보다 더 불편한 팬티구나.”

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옆에서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섹시함보다는 예쁘고 귀엽고 언젠가 내 살에 닿는다면, 접촉면이 부드러운 팬티를 만들고 싶었다. 실용적 이미지에서 시각적 이미지로의 전환. 말이 쉽지, 팬티는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작지만 쉽지 않았다. 면과 레이스를 섞어 만들면, 면은 늘어나고 레이스는 줄어들고, 팬티의 형상이 우습게 돼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팬티에 레이스를 넣으면서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단순한 디자인에 시스루 소재를 덧붙여 귀여운 느낌을 살리고자 했는데, 망사로 된 부분이 수축되는가 하면 면이 늘어나기도 하는 바람에 불만을 토로하는 댓글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주문이 조금 뜸해졌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이 바람에 날아갈 듯 세차게 펄럭였다. 바라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르바이트 일을 하루 쉬고, 집에 갔던 건 지금은 잊었지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새엄마는 시장에 가고 집에는 아버지만 있었다. 구름 낀 하늘이 금방이라도 땅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날씨, 잠시 후 비가 오기 시작했다.

거둬들이지 않은 빨래가 빨랫줄에 있었다. 그것들을 거두어 방으로 들어갔다. 옷들이 눅눅했다. 대부분이 동생들 것이었고, 아버지 러닝셔츠와 새엄마의 팬티가 있었다. 원래는 꽃무늬였을 듯싶은데, 절반쯤 색이 빠진 천에 나비가 날고 있었다. 나달나달해진 바탕에 나비가 왔다간 흔적처럼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첫 월급을 받고서 새 엄마에게 속옷을 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몇 사이즈를 입으세요, 물어볼 수 없어서 망설이기만 하다 결국 화장품 세트를 사드렸다. 새 엄마에 대한 오래된 소문 중 하나는 엄마가 살아있을 때, 새 엄마와 아버지가 아는 관계였다는 것이었다. 아는 것 뿐만이 아니고 더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문에 엄마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쉬쉬거렸다. 막연하게나마 그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새 엄마는 워낙 검소한 사람이었다. 모든 걸 아꼈다. 특히나 자신을 위한 일엔 더 인색한 것 같았다. 나와 동생 민호에게는 아무것도 아까와 하지 않으면서 새 엄마가 낳은 규호에겐 때로 가혹하기까지 했다. 규호는 태어날 때부터 민호를 따랐다. 큰 형인 나를 어려워했다. 새 엄마도 그런 편이었다. 아무리 다가가려해도 새 엄마와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지난해였던가. 여름휴가 때, 세면 타월을 찾느라 서랍을 열어보다가 포장된 채 그대로 있는 새 엄마의 속옷 상자를 보았다. 왜 꺼내 입지 않고 그대로 둘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팬티M은 아주 느리게 안정이 돼 갔다. 인규가 애쓴 보람인지, 블로거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사용 후 소감이 좋았다. '단연 강추!'라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처음 출시할 때 우리가 책정한 가격은 장 당 9900원이었다. 조금 비싸 보이긴 하지만 아주 비싼 가격은 아닌 듯했다. 그러다 가격라인을 바꾸었다. 이것도 인규의 의견으로 세트로 판매하면서 가격을 조금 올렸다. 일주일 세트도 잘 나갔다. 요일마다 색깔을 구분지어 만든 팬티는 이상스레 잘 팔렸다. 덕분에 박수진 씨는 종일 봉제를 하느라 점심 먹으러 나갈 시간이 없었다. 손톱 주위에 생긴 거스러미 때문에 그녀의 손이 닿으면 레이스가 뜯겼다.

어떤 날 갑자기 떠오른 스케치 때문에 홍대 앞을 지나가다 팬티M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살짝 문을 열었는데 인규의 무릎 위에 박수진 씨가 올라가 있었다. 엉덩이 위까지 치마가 말려져 있었다. 팬티는 오렌지색이 선연했다. 스틸화면처럼 모든 동작이 일시에 중지되었다. 어떤 경우에 브레히트는 속옷을 언급하게 되었을까. 정말 극적인 상황이었다. 다시 나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고 머릿속만 복잡한데, 인터폰이 울렸다. 그녀가 인규의 무릎에서 어기적거리며 내려왔다. 곧이어 중국집 배달원이 계단을 올라왔다. 나는 배달원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누군가 내가 만든 팬티를 입고, 신혼여행 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요.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박수진 씨가 잠시 전의 일 같은 건 아무렇지 않은 듯 입술 가장자리에 짜장을 묻힌 채 말했다.

“언젠가 네가 만든 팬티를 입고, 결혼해서 너도 피지로 여행가면 되는데, 뭘.”
불어터진 짬뽕을 꾸역꾸역 건져 먹으며 마치 남처럼 인규가 대꾸했고, ‘내가’와 ‘네가’ 사이에서 헷갈린 나는 그걸 분간하느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보여주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오차가 존재하는 듯했다.

팬티 일을 하자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하는 게 스커트다. 요즘 나날이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32cm만 돼도 좀 나을 텐데. 30cm 초미니스커트가 출시되고 있었다. 스커트가 짧아지면 그에 맞추어 팬티 길이도 짧아져야 한다. 슬립이 겉으로 나오는 것까진 괜찮지만 팬티가 스커트 아래로 삐져나오면 웃기는 일이니까. 하지만 팬티를 너무 짧게 만든다는 건, 요람에서 무덤까지, 속옷의 원래 기능을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 가릴 건 가려야 되고, 어찌 되었든 팬티 밖으로 음모가 비집고 나오는 건 막아야 했다. 샘플링 작업 후에 나온 결과물을 보면 한심할 정도였다. 내가 제대로 만든 건가, 그 부피감이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길에서 여자들을 볼 때에도 스커트 속이 궁금했다. 저 여잔 팬티를 입고 있을까. 어떤 팬티를 입고 있을까? 팬티라인이 드러나지 않은 걸로 봐선 폴리에스터를 쓴 것 같은데, 스판덱스가 몇 퍼센트 들어갔을까, 여자는 몰라도 점점 그 속을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거리에서 직접 사람을 볼 때만이 아니다.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모니터 속 저 여자는 어떤 팬티를 입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도 많다. 일 때문에 생긴 버릇이지만 언뜻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팬티에 집착하는 거나 자동차에 집착하는 거나 뭐가 다를까? 내가 비난을 받는다면 그건 팬티는 속옷이기 때문일 것이다. 블라우스 색이 예쁘네요, 라고 말하면 여자들은 좋아한다. 속옷이 보이네요, 속옷 색깔이 참 좋네요, 라고 말한다면 별 이상한 놈 다 봤다는 듯이 나를 째려볼 것이다. 그럼 보이는 걸, 안 보인다고 할까. 그러려면 속옷을 좀 더 속으로 밀어 넣던가, 아니면 겉옷을 속옷보다 길게 입으면 될 텐데.

그런데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브레히트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연극 대사 속의 말이 아니라면 인터뷰를 할 때 누군가 그의 말을 받아쓴 것이 아닐까. 여자가 아닌 남자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영 새롭게 느껴진다.

사무실을 나서다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세탁소에 그 신데렐라 팬티가 걸려있는 걸 보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치 미래에 대한 예시와 같은 존재감이 느껴졌던,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한 팬티였다. 하늘하늘한 실크에 금빛 레이스를 달고 무게가 10그램도 채 안 된다는 팬티는 배꼽 아래 진주알을 품고 있었다.

팬티를 숨기면 옛사랑이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녀와의 마지막 밤의 일이었다. 12시까지만 같이 있자, 더 이상 만나자고 사정하지 않을게. 옛사랑을 붙잡고 모텔로 갔다. 이대론 못 보내, 떼를 쓰듯 질질 그녀를 끌고 방에 들어갔다. 내일이면 유럽행 비행기에 타고 있을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나는 반쯤 웃고 있었다. 울고 있는 나보다 웃는 네가 더 슬퍼 보여, 그녀가 울다가 말했다. 그리곤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스스로 겉옷도 벗고 팬티도 벗었다. 하지만 그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을 써도 그랬다. 12시가 되어 가니, 점점 마음이 두려워졌다. 침대 아래 떨어진 팬티를 주워 등에 깔고 자는 척 눈을 감았다. 그녀가 그걸 찾느라 시간을 넘길 것 같아서였다. 떠난다는 말을 취소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몇 번 시트를 들추고 침대 밑을 살피다 자는 척하는 나를 깨우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직도 내 방 서랍 속에 들어있는 그녀가 남기고 간 밤 열두 시 동화 속의 신데렐라 팬티.

유리창 너머 팬티는 이제 불그스레하게 변해있다. 배경으로 옷걸이에 걸린 붉은 원피스가 어른거린다. 세탁물을 옮기는 작업을 하는가보았다. 팬티는 이제 곧 치워질 것인가,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다.

가끔 벼락 치듯, 섹스를 하고 싶다. 섹스를 하려면 통과해야 되는 첫 관문이 팬티 벗기기 아닐까. 스스로 속옷을 홀라당 벗어버리는 여자라면, 좀 싱겁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를 먹을 때 누군가 껍질을 벗겨놓으면 금방 색이 변하고 과즙이 흘러내려 맛이 없다. 살며시 살을 만지며 팬티를 벗겨 내릴 때 기분, 그런 거 느껴본 지 너무 오래됐다.

옛사랑이 떠나고 성희를 만났다. 그녀와 처음 섹스를 하던 날, 브래지어가 여간해서 잘 벗겨지지 않았다. 팬티는 쉬웠다. 아주 짧은, 중요부분만 겨우 가린, 성희의 팬티를 보며 쿡쿡 웃음이 나왔다. 엉덩이 부위에 곰이 그려져 있었다. 갑자기,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 그런 노랫말이 생각나 다음 동작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이윽고 입술로 팬티를 벗기고 그곳에 부드럽고 진하게 키스를 할 참이었는데, 그놈의 곰 세 마리 때문에, 그녀와의 처음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런 날 왜 그녀는 곰 팬티를 입고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이미 팬티의 중요성을 실감했던 것인지 모른다. 브레히트의 말이 옳았다.

밤늦게 민호가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형, 엄마 생신인데 시간 되면 한번 내려와. 왔다간 지 꽤 됐잖아. 기다리시는 눈치던데’

그러고 보니 대구 집에 다녀온 지도 꽤 되었다. 생신인데 뭘 선물할까 생각만하다가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생일 전전날이 되었다. 불현듯 빨랫줄에 걸려있던 새엄마의 속옷, 서랍 안에 들어있던 속옷 상자가 생각났다. 기본 스타일 팬티에 '이영혜'라는 글씨만 자수로 박아달라고 박수진 씨에게 부탁했다.

내가 가져온 팬티를 보더니, 새 엄마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히다가 두 눈이 붉어졌다.

“웬 속옷이 이렇게 고와, 이걸 어떻게 입어…… ”
“왜 못 입으세요? 해져서 못 입진 않으니, 그냥 입으세요.”
“네 어머니께 미안하다.”

왜 그렇게 허접한 속옷을 입고 사는지, 뜬금없이 엄마에게 미안해하는 건 무슨 까닭인지, 상자 속 팬티를 입지 않은 사정이 따로 있는 것인지, 이제는 들려줄 수도 있을 것만 같은데 새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단지 연보라색 꽃무늬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고, 눈물은 아버지 눈에도 울컥 스미었다.

팬티M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만든 팬티는 붉은색 망사팬티였는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소문을 듣고 사이트를 방문한 소비자들이 장바구니에 담은 팬티들을 속속 결제했다. 붉은색 내의를 입으면 돈이 생긴다는 속설도 한몫을 한 듯했다. 주문은 늘고 있었으나 갈수록 팬티에 대한 느낌이 무덤덤해지고 있었다. 매일매일 숙제의 연속이었고, 왠지 모를 미묘한 기류가 인규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쇼핑몰을 처음 시작할 당시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들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규는 자금과 회계를 담당하겠다고 해놓곤 번번이 분기 결산보고를 뒤로 미루었다. 택배 건수는 다달이 늘어가고 있는데. “아직은 더 있어봐야 알지.” 하는 말로 결산은 모호하게 처리했다. 월급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엄연히 나는 투자를 한 터였다. 금전관계를 흐지부지 처리하는 인규가 못마땅하였다. 그냥 동업자 관계인 듯 때로는 연인 관계인 듯한 인규와 박수진 씨와의 관계도 찜찜했다. 내가 결산에 대해 말하면 그녀도 인규와 마찬가지로 함께 유보적 태도를 취해 오히려 그걸 재촉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때도 있었다.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가끔 CCTV를 상상하곤 했다. 오렌지색이 어른거렸다. 자리를 비우는 척하다가 슬쩍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도 싶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 내가 몹쓸 사람 같아서 팬티M에 나가는 게 꺼림칙했다. 나 자신이 구차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에 만든 히트상품을 끝으로 팬티M에서 탈퇴했다. 동업이었든 투자였든 그게 앞으로도 계속 말썽의 소지가 있고, 거기에 대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면 차라리 서로 관계도 나쁘지 않고 자금 사정도 나쁘지 않은 시점에서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것 또한 내 미래사업의 연습일 수 있었다. 투자한 돈은 회수했지만 이익금은 없었다. 아마 아주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것 역시 인규가 모호하게 처리하였다. 투자 면에서는 2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낸 듯하지만, 그러나 몇 가지만은 그동안 확실히 깨친 셈이었다. 사업이든 아이디어든 제품으로 생산되는 그 어떤 것이든 머릿속이 아니라 손끝과 노력에서 나온다는 것. 사업에서 우정과 동업은 다르다는 것,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나만의 어떤 사업을 구상하게 될 때 업종과 제품군은 달라지더라도 이번 팬티 사업이 내 인생에서도 좋은 밑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디자인한 팬티 세 장을 새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것도 새 엄마와의 관계에서 작지만 알찬 추억이 될 것이다.

얼마 전 세탁소에 들렀을 때 여주인이 말해주었다. 한때는 신데렐라 팬티를 입고 살던 사람이 지금은 병상에 있는 처지라고 했다. 언제 다시 입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박물관에 걸린 그림처럼, 일 년에 서너 번 드라이클리닝을 하여 보관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노트북에 간략히 메모해 보았다. 팬티를 생각하면 거둬들이지 않은, 비 맞은 팬티가 아직 빨랫줄에 걸려 있는 듯 가슴속이 저릿저릿하다.

무엇보다 피부에 닿는 면이 부드러울 것.
옷에 묻어나는 몸 냄새를 줄일 방법을 생각하기.
팬티 안이나 밖에 향낭을 달아 놓는다면?
단가를 낮출 수 있다면 원단으로 모달(너도밤나무에서 추출한 천연섬유)을 쓰는 방안?

오늘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여자들을 본다. 핸드백으로 가리고 책으로 가려보지만 보일 건 그래도 다 보인다. 팬티를 볼 때마다 이 세상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든다, 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좀 더 적극적으로 여자팬티를 만져보고 마네킹에라도 입혀서 벗겨보고 주물러보고 빨아보고, 그랬더라면 팬티M에서의 작업이 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팬티가 꼭 끼는 것 같다. 그새 몸무게가 늘어난 것일까. 사무실 공기가 답답해 밖으로 나왔다. 1층 편의점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돌아다보니 세탁소가 보인다. 옷걸이에 있던 신데렐라 팬티는 어디로 갔을까. 가을이다. 이름 모를 색색의 나뭇잎들이 도로에 수북이 쌓여가고 있다.



오늘의 꿀팁

  • 띠운세
  • 별자리운세
  • 날씨
  • 내일 뭐입지

많이 본 뉴스

인구이야기 POPCON (10/8~)
메디슈머 배너_슬기로운치과생활 (6/28~)
블록체인

포토 /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