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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게' 모은 수십억 기부, 통큰 '젓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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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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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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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당당한 부자-소셜홀릭]노량진 충남상회 류양선씨 "내 직업은 기부하는 것"

▲노량진 수산시장의 충남상회에서 '책 할머니' 류양선 할머니가 노란 옷을 입은 채 젓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노량진 수산시장의 충남상회에서 '책 할머니' 류양선 할머니가 노란 옷을 입은 채 젓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어둠이 깔린 노량진 수산시장의 저녁 8시, 빼곡한 상점 사이를 돌고 돌아 찾은 젓갈가게 충남상회.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류양선 할머니(78세)가 가게 한 쪽 귀퉁이에서 소박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찬밥에 오이소박이, 열무김치와 간장게장이 찬의 전부다.

'밥 먹고 왔다'고 식사를 사양했지만 80대 이웃할머니가 직접 담가 줬다는 오이소박이에 눈이 간다. 시장이 반찬이다. TV 일일연속극을 보며, 결국 찬밥 한 그릇을 같이 비운다. 상점에는 한서대 장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마다 모두 노란 옷이다. 알고 보니 모 방송프로그램 봉사대 유니폼이다.

남자 손님 둘이 상점 앞을 기웃대자 "얼른 사, 지금 안사면 바로 문 닫을 거야"라며 쾌활하게 목청을 높인다. 밉지 않은 으름장이다. "할머니도 참, 성격 급하셔요." 두 남자가 너털웃음을 짓고 지나친다.

오후 9시, 장사를 마칠 시간이다. 날은 덥고 손님은 드물었다. 하루 매상이 얼마 나왔냐고 물었다. "손님이 많으면 엔돌핀이 도는데 올 들어 장사가 안 돼. 그래도 (내가) 장사 기술로는 대한민국 최고지. 많이 벌어야 또 기부하지."

'노란 옷 아가씨', '책 할머니'. 36년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젓갈장사를 해온 유양선 할머니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노란 옷을 입고 장사를 하고, 노란 옷을 입고 기부를 한다. 산간 오지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는 게 알려지면서 책 할머니가 됐다.

처음 기부를 했던 게 벌써 20년도 훨씬 전이다. 중학교에 입학할 학비가 없었던 소년은 할머니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치고 초등학생 자녀를 둔 작은 기업의 사장이 됐다. 할머니가 보내준 장학금으로 간호대를 졸업한 어느 여학생은 서울대학 병원에 취직했다.

그동안 얼마나 기부를 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걸 세고 있나. 주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거지." 한두 번으로 그친 것도 아니고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닌데 굳이 기억할 이유는 없다. 물어본 기자가 무안하다.

하지만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공개된 할머니의 기부 내역은 화려하다. 150여 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0만권 가까운 책을 산간오지 학교와 양로원 등에 기증했다.

1998년에는 경기 광명시의 임야와 건물 1430㎡, 2006년에는 제주 서귀포시 성산면의 임야 4732m² 등을 한서대에 대학발전용지로 기부했다. 2008년에는 김포 고촌면 전호리의 대지와 전답 1038㎡를 또 한서대에 기부했다. 어림잡아도 수십억 원에 달한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충남 서산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난 죄 아닌 죄로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공부는 똑 떨어지게 했지만 입에 풀칠하기 쉽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부친은 책보를 거름통에 빠뜨리며 진학을 말렸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됐다. 젓갈장사를 하면서 돈이 모이는 족족 공부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죽는 날까지 책을 가까이 하라"며 기증하기 시작한 게 아예 장학재단까지 만들게 됐다. 장학금을 전달할 때는 책도 함께 선물한다.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할머니의 신조다.

할머니는 1000원 한 장 허투루 쓰질 않는다. 다 헤져 버려야 마땅할 걸레를 들어보이며 말한다. "이거 낡아도 구석구석 닦기엔 최고야. 세상에 헤져서 버릴 건 없지."
집에서는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불도 안 켜고 가로등빛을 형광등 삼아 생활할 정도다. 이렇게 안 쓰고 차곡차곡 모아 20년 이상 기부를 한 것이다.

할머니는 올 들어 기부를 한 푼도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젓갈장사는 김장철에 벌어 1년을 나는데 지난해 9월 위암수술을 받느라 대목 시즌을 놓쳤다. 장사 잘 되면 또 기부를 하겠느냐 물으니 "당연히 해야지, 그게 내 직업인데…"라고 받아친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밥도 먹었는데 젓갈이나 사갖고 가!" 배낭을 주섬주섬 들고 가게를 나선다. 얼떨결에 산 어리굴젓 500g을 가방에 넣고 할머니를 따라 나선다. 퇴근길의 시장상인들이 할머니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처음 노량진 수산시장 왔을 땐 불이고, 수도고 아무것도 없었지. 내가 수산시장 초창기 멤버야."

그 사이 검은 머리는 하얗게 새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오늘은 유난히 다리가 부었다. 집에서 수산시장까지 가는 걸음도 쉽지는 않다. 위암수술을 받은 후로는 설사가 잦다. 짜고 맵고 차가운 음식은 금물이다.

이제 '기부 그만하고 노후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 "자다가도 죽는 게 사람이야. 쌓아둬서 뭐해. 100만 원을 남기고 죽어도 버리는 돈 아니냐"고 반문한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였지만 그 어려운 시절에도 할머니의 모친은 배고프다고 문 두드리는 이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주고 돌아서는 순간이 제일로 행복해. 하루 세끼 밥 챙겨 먹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고..."

할머니는 시간을 되돌려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공부를 해서 대학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내가 교수가 됐으면 공부 안 하는 학생들 눈물 쏙 빠지게 야단치는 최고 교수가 됐을 거야. 하하. 장사가 더 잘 돼서 더 많이 벌었으면 학교를 세웠으면 했는데…."

할머니 입에서 빌 게이츠의 이름이 나왔다. "기부는 전 세계에서 빌게이츠가 최고라면서? 갑부들 독려해서 수십조 원 기부하게 만들었다고 왜 TV에도 나오던데." 최근 빌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억만장자 기부모임을 만들어 6주 만에 40명에게 기부 약속을 받아낸 것을 두고 할머니는 제 자식 일처럼 기특해했다.

이튿날 오후 땀띠약을 들고 다시 할머니를 찾았다. 더운 날씨에 온종일 상점을 지키자니 땀띠가 났다고 했다. "이렇게 힘들게 버는데 아무나 도울 수는 없잖아. 정말 필요한 학생에게 줘야지. 아무리 어려워도 꼭 해내려는 학생들 말이지."

할머니는 미리 쪄둔 고구마를 내밀며 미안해했다. 전날은 기자를 사칭해 돈을 얻어 가려는 줄 알고 일부러 야박하게 대했단다. 종종 신문기사를 보고 빚을 갚아달라고 집으로 따라오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대학신문 기자라며 취재하는 척하고 돈을 꿔가고 모르쇠 한 이도 여러 명. 그 후로 집에 초인종을 떼어냈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 할머니에게 '기사가 나가면 젓갈 사러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한 뒤 수산시장을 나왔다. 노란옷의 책 할머니, 건강히 오래오래 장사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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