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재선거]①파국의 서막인가

ⓒ아테네(그리스)=홍봉진 기자

가장 큰 우려는 그리스 위기의 전염효과이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구제금융을 받은 포르투갈과 아일랜드의 금융권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특히 위기의 전염효과가 그리스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큰 스페인과 이탈리아까지 퍼져 이들 국가가 휘청거리게 되면 위기는 최악의 사태로 치닫게 된다.

◇내달 재선거 실시...뱅크런·세금미납 등 위기 징후 확산
지난 6일 그리스 총선에서 구제금융의 조건인 긴축이행을 지지하는 신민주당과 사회당은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1~3당이 차례로 연정구성을 위한 교섭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유로존 잔류와 국가부도 사태 방지를 위한 거국내각과 기술관료 정부 협상이 진행됐지만 긴축을 반대하는 2당 좌파연합(SYRIZA·시리자)의 참여 거부로 이마저도 무위에 그쳤다.


지난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사회당 대표는 15일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과 면담 뒤 기자회견에서 "유감스럽게도 그리스가 무척 좋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총선을 치르게 됐다"고 말했다. 총선 시기는 다음달 17일로 예상된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망했다.

지난 6일 총선에서 2당을 차지했고, 내달 선거에서 다수당으로 원내 입성이 예상되는 좌파연합은 긴축이행 파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그리스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구제금융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재선거를 통한 좌파정부 수립 의지를 밝혔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그리스에선 국가부도와 유로존 탈퇴를 예상하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전날 파풀리아스 대통령은 그리스 정치 지도자들에게 전달한 성명에서 "지방 은행에서 하루 동안 7억유로의 예금이 인출됐다"며 "그리스 대출자들이 매우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즉, 뱅크런(예금 대규모 인출사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수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현지 일간지 이메리시아는 "국민들이 국가부도 사태와 옛 통화 드라크마의 부활을 예상하고 유로화를 확보할 심산으로 세금납부를 미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현재 정부 재원은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 지급 축소와 세수 부족으로 15억유로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전했다.

◇구제금융 재협상 가능성 낮아
치프라스 대표는 긴축엔 반대하면서도 유로존 잔류는 희망하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 모순된다. 긴축에 반대하면 구제금융이 중단돼 그리스는 한두달 내에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고 결국, 유로존에서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프라스 대표는 유로존 존속을 내세워 구제금융을 재협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리스 정치권의 강경노선에 국제 채권단 쪽에서 유화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장 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의장은 지난 14일 "환경에 극적인 변화가 있다면 (그리스가 재정적자 목표를 달성할) 기간 연장 논의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이는 EU내에서 합치된 의견은 아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15일 "그리스가 예산삭감 약속을 못지키면 자금과 시간을 더 주는 적절한 (협약) 개정이나, 질서있는 유로존 퇴출이 요구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리스가 최선은 다했지만 긴축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긴축 완화라는 당근이 제공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긴축을 파기하면 유로존 퇴출까지 감내해야 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독일은 더욱 강경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5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우리는 그리스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그리스와 국제 채권단 사이엔 "준수돼야 하는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도 EU가 그리스의 인프라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성장지원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구제금융 조건은 재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씨티그룹 글로벌 마켓의 이코노미스트 윌렘 뷰이터는 구제금융 재협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뿐 아니라 긴축안을 추진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는 재정위기국 정부에 "좋지 않은 선례를 주게 된다"며 재협상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전망했다.

◇그리스 유로존 이탈시 총 1조유로 피해규모
현재로선 긴축이행에 반대하는 좌파정부가 들어서고 국제 채권단과 독일이 재협상 거부의사를 고수해 그리스가 파국을 맞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스가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고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옛 통화 드라크마가 다시 통용되면 드라크마는 유로화에 최대 50% 이상 평가절하될 수 있다. 그래서 옛 통화 부활을 앞두고 뱅크런이 심해질 것이며, 주주들이 대량으로 투매에 나서면서 증시 역시 폭락장에서 당분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 금융기관에 유로화로 자금 대출을 받은 그리스 기업들은 드라크마의 평가절하로 부채가 급속히 증가하고 자금줄이 막혀 대량 부도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3300억유로(490조원)의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그리스 정부도 부채 부담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위기의 확산이다. 데니스 스노워 키엘 세계경제연구소 소장은 "가장 큰 위험은 금융계의 전염이다. 포트루갈과 같은 위기국에서도 뱅크런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정위기국도 유로존을 떠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유럽 국가들의 국채 금리는 폭등할 수 있다.

특히 덩치가 큰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휘청거리게 되면 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빠져들게 된다. 유럽이 5000억유로로 방화벽을 쌓았다지만 우려를 해소시키기엔 충분하지 않은 규모이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EU의 명성에도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통합의 대들보인 유로화의 포기는 유럽 구제 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약 450개의 금융기관을 대변하는 국제금융협회(IFF)는 지난 2월 내부 문건에서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나면 ECB부터 민간금융기관, 유로존 정부들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고 전하며 총 피해규모가 1조유로(1476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내달 17일은 프랑스, 그리스 총선 동시에 치러져
한편 지난 6일 동시에 열려 유럽의 정치 판도를 바꿔놓은 그리스와 프랑스와 정치 이벤트가 다음 달에도 같은 날 치러질 가능성이 커져 주목된다. 프랑스는 다음달 10일과 17일 총선을 진행하며, 그리스는 17일에 재선거를 치를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속한 집권 사회당이 과반을 확보하면 의회의 힘을 등에 입고 신재정협약 재협상 등과 관련해 독일과의 팽팽한 기싸움이 예상된다. 반대의 경우라면, 사회당의 개혁 추진이 차질을 빚을 수 있어 또 다른 혼란이 예상된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당이 주도하는 좌파연대는 최근 대선에 패한 대중운동연합(UMP)에 10% 포인트 이상의 승리가 예상된다. 하지만 안정 과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프랑스에서 대통령이 의회 과반을 유지해야 정부를 운영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야당 총리에게 그 권한이 넘어가면서 동거정부가 구성된다.

그리스 재선과 프랑스 총선 결과를 반영하는 18일은 월요일이다. 그래선지 벌써부터 '블랙먼데이' 경계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