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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영 삼성重 사장의 4전5기 성공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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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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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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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카이스트서 '열정락(樂) 시즌4' 강연‥"일꾼이 아니라 역사를 이룬다"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이 지난 14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열린  토크콘서트 '열정락(樂)서'의 강사로 나서 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학생들에게 얘기하고 있다./사진제공=삼성중공업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이 지난 14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열린 토크콘서트 '열정락(樂)서'의 강사로 나서 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학생들에게 얘기하고 있다./사진제공=삼성중공업
"그냥 일꾼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크면 성취도 크게 마련입니다. 사장이라는 직책은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대가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박대영 삼성중공업 (7,390원 상승90 -1.2%) 사장(사진)의 '성공 사장론'이다. 박 사장은 세계 1위의 드릴십을 만들어 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신입으로 입사한 엔지니어 출신이 CEO(최고경영자)까지 올랐다.

박 사장은 지난 14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열린 '열정락(樂) 시즌4' 강연에 자신의 성공 과정을 담담하게 밝혔다. 그는 자신을 '운이 좋은 사나이'라고 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박 사장은 학창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방황기를 보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낮에는 학생으로, 밤에는 주먹 좀 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이중생활을 했다. 그룹사운드까지 구성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했고 꿈이라는 건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대학교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 차렸다.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 운 좋게 대학교에 입학했다. 1, 2학년 때는 데모와 휴교가 반복되면서 역시 공부와는 거리를 뒀다. 그런 그가 삼성에 입사하게 된 데에도 운이 따랐다.

군복무를 마치고 4학년으로 복학했을 시절. 정부가 중화학 공업 육성책을 펼치던 70년대에 공대 엔지니어 출신의 몸값은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삼성에서는 학교를 찾아다니면서 면접을 봤다. 면접 보러 간다는 친구를 얼떨결에 따 라 갔다가 덜컥 합격했다.

삼성에 입사해 삼성중공업으로 배정받아 창원 기계설계실로 발령이 났다. 도면도 볼 줄 모르고 재료역학 같은 용어도 생소했다. 그가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아까운 청춘이었다. 도서실에서 관련 책자와 자료를 찾아보면서 3년간 죽기 살기로 덤볐다. 도서실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눈감고도 찾을 수 있게 됐다. 그러자 동기와 선후배들의 질문에도 술술 답할 수 있게 됐다. 회사 내에서 그는 '해결사'로 통했다.

어느 정도 일에 적응했을 입사 3년차 때, 그는 돌연 사표 냈다. 반복되는 야근에 지쳐있을 때였다. 정시에 퇴근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결국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로 옮겼다.

하지만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회사로 출근한 지 3일째 되는 날, 삼성중공업 상사의 손에 이끌려 컴백했다. 박 사장은 그분을 지금까지도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삼성중공업 CEO '박대영'은 없었을 것이고, 세계 1위 드릴십 탄생 신화도 쓰지 못했을 일이다. '성공 뒤에는 우연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필연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그 후 그에게 또 한 번의 찬스가 찾아왔다. 6개월 미국 연수의 기회를 얻게 된 것. 그는 식품공정 회사에서 설탕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설탕 만드는 방법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하지만 연수를 갔다 온 그는 삼성중공업에서 해수담수화 설비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얘기에 무릎을 쳤다. 해수담수화 사업이란 쉽게 말해 바닷물을 먹는 물로 만든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원당이 설탕으로 변하는 과정과 흡사했다.

본부장에게 미국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수담수화 사업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다음날로 그는 담수화사업부로 발령났다. 하지만 1년 동안 각종 입찰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담수화사업부는 문을 닫았다.

그 다음으로 추진한 신규사업이 바로 해양사업. 박 사장은 해양사업에 투입됐다. 신규사업이다 보니 외부에서 사람들을 영입, '외인(外人)부대'로 불려졌다. 수주도 못하고 적자가 지속되는 '왕따 부서'였다. 하지만 오일쇼크 이후 유가 고갈 등의 이슈가 번지면서 해양사업 미래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해양사업부가 빛을 보기 전에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로 발령났다. 10년 동안 해양사업에서 손을 떼야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현업에 복귀할 당시 관계사 사장들이 같이 일하자고 제의해왔지만 뿌리쳤다. 당시 해양사업부는 해양업이 아닌 육상교량 일을 하면서 3000억~4000억 원 매출을 올리는데 그치는 부서로 전락 해 있었다. 그 당시 만든 다리가 청담대교, 가양대교, 인천대교 등이다.

박 사장은 우선 해양부문 매출을 2조 원으로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삼성중공업은 해양사업 분야에 후발주자였다. 후발주자의 강점은 마음대로 하게 되는 여건이 마련된다는 것. 일이 힘들수록 찾아오는 성취감은 더욱 컸다.

"후발주자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남과 다른 차별화가 필요하다. 한발 앞서서 새로운 것에 도전한 결과 1995 년에 세계 최초 드릴십 개발에 성공했다. '왕따 찌질이 부서'가 현재 58척, 35조 원에 이르는 수주를 달성했다. 업계 1위에 오른 것은 끊임없는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박 사장)

물론 실패의 쓴잔도 맛봤다. 처음 수주 받은 드릴십을 완성했는데 몬순(강우를 동반한 계절풍)으로 해양에 설치하는 데 실패했다. 손해가 무려 2000억 원이나 됐다. 1년 후 몬순을 피해 설치했지만 납기일이 늦어져 패널티 배상금까지 물게 되면서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한해에 1억씩을 갚는다면 2000년을 갚아야할 엄청난 금액. 그때 박 사장은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지고 불면증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에게 기회를 줬다. 쫓아내기보다 사업을 더 키우면 만회가 된다는 회사의 방침이 목숨 걸고 일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됐다.

"무엇이 되기 위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냥 일꾼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꿈을 갖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삼성은 저에게 꿈을 심어줬고 그 이후 줄곧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사장이나 부사장이라는 직책은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대가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꿈의 크기도 성취도 더욱 큰 법입니다."

CEO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박 사장의 설명은 의외로 너무 단순했다. 진리와 성공은 단순하다는 것을 또 한 번 증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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