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속보
통합검색

[MT교육 오늘의 역사] 1882년 오늘 임오군란 발발

머니투데이
  • MT교육 정도원 기자
  • 카카오톡 공유하기
  • 카카오톡 나에게 전송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 문자
  • 2013.07.23 08:30
  • 글자크기조절
  • 의견 남기기
"지금 선혜청에 무슨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라고 하면서 대청 위에 돌을 마구 던져 낭관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영의정 홍순목)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고종)

1882년 오늘(7월 23일) 서울에서 대규모의 군사 반란이 일어나 왕족, 민씨 척족, 일본인 등이 살해당했다. 1882년이 60간지로 임오년이기 때문에 임오군란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19년, 청나라에서는 광서 8년, 일본에서는 메이지 15년의 일이다.

◆차별 대우와 급료 체불에 격분한 구 군인들, 군란을 일으키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며 정권을 잡은 민씨 척족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한 이래 통리기무아문 설치, 총리대신 신설, 별기군 창설 등으로 개화 드라이브를 걸었다. 한편 대원군은 운현궁에 칩거하여 호시탐탐 재집권을 노리며 이러한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의 여론을 모으고 있었다.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소위를 초빙하여 양반 자제들로 이뤄진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구식 군대에 대해서는 급료조차 지급하지 않을 정도로 차별 대우를 하자 구 군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2년 7월 23일 병조판서를 겸하던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선혜청의 곡식으로 일단 한 달치 봉급을 주도록 명했다. 이에 구 군인들이 봉급을 받기 위해 선혜청으로 몰려갔는데 민겸호가 곡식을 착복하기 위해 쌀을 빼돌리고 겨와 모래를 섞었으므로 구 군인들은 격분하여 봉급을 나눠주던 선혜청의 관리와 민겸호의 하인들을 구타하였다.

◆일본 공사, 왕후 민씨 군란에 쫓겨 탈출

군란을 일으킨 구 군인들은 민겸호와 민창식 조손(祖孫)을 척살했다. 또 "대감네 말은 약밥만 먹는다면서요?"의 주인공으로, 부정축재로 악명높은 흥인군 이최응도 죽였다. 한편으로 일단의 구 군인들은 별기군 교관인 호리모토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이 때 일본 공사관은 지금의 서대문역 2번 출구 밖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구 군인들이 공격해오자 하나부사 요시타다 일본 공사는 외교 기밀을 파기하기 위해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탈출했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인접한 경기감영(지금의 서대문역 4번 출구 밖 적십자병원 자리)으로 탈출했으나 이 곳으로도 구 군인들이 짓쳐들어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였으므로 다시 인천으로 도망했다. 인천에서 무작정 바다로 탈출한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영국 측량선에 의해 구조되어 나가사키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공관원 9명이 죽었다.

구 군인들의 원망은 부정부패의 상징이자 민씨 척족의 수괴인 왕후 민씨(명성황후)에게 집중되었으므로 구 군인들이 범궐했을 때 왕후는 생사의 기로에 처했으나, 홍계훈이 왕후를 자신의 누이라 속이고 등에 업어 탈출시켰다. 왕후는 일족인 민응식이 충주목사로 있었으므로 장호원으로 달아났다.

◆무리수 두던 대원군의 재집권 한 달만에 끝나

구 군인들이 살해한 이최응은 고종 임금의 큰아버지로, 영의정과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 영돈령부사 등을 지낸 고관 중의 고관이었다. 또한 민겸호도 병조판서로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대신이었으므로 이들을 참살한 것은 대역에 버금가는 대죄였다. 이렇듯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나니 뒷일이 막막하였으므로 구 군인들은 왕후 민씨의 정적 대원군에게 몰려가 권좌에 복귀할 것을 호소했다. 대원군은 짐짓 못 이기는 척하며 군란 수습을 명분삼아 입궐, 다시 정권을 잡고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혁파했다.

또 대원군은 정적 민씨를 정계에서 매장하려는 속셈으로 왕후의 사망을 선언하고 국상을 선포했다. 이 때 "중궁전의 시신을 찾을 수 없으니 입던 옷을 가지고 장사를 지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자, 판중추부사 김병국은 "하교를 받고 보니 기가 막혀 어찌할 수 없다"며 "다시 더 널리 수소문한다면 신명이 도와 찾지 못할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영의정 홍순목은 "신들의 원통한 마음으로써는 전혀 하교를 받을 수 없다"며 "이제 만일 이 하교를 받든다면 역사에 기록되어 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승정원의 승지들도 일제히 상소를 올려 "연명으로 호소하는 바이니 삼가 명을 속히 취소하소서"라고 하자 대원군은 "이 일은 이와 같이 서로 버틸 일이 아니다"라며 화를 내고 승지들을 모두 체직한 뒤 임시로 가승지를 임명하여 명을 반포할 정도로 무리수를 두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재집권은 불과 한 달만에 끝이 났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구 군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토벌, 학살하고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한 뒤 다시 민씨를 권좌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왕후 민씨는 권좌로 복귀한 뒤 가혹한 보복 정치를 펴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한편 일본은 조선의 군란으로 공사관이 불타고 공관원들이 살해당했다 하여 군함 5척을 인천에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청나라의 중재 하에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어 △20일 내에 책임자 처벌 △유족 보상금 지급 △배상금 지불 △사죄 특사 파견 등이 결정되었다.



베스트클릭

오늘의 꿀팁

  • 날씨
  • 건강쏙쏙

많이 본 뉴스

머니투데이 페이스북 퀴즈 이벤트
부꾸미
사회안전지수

포토 / 영상

머니투데이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