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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진의 증권 반세기] 주가 30% 폭락, 잔인했던 '여의도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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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9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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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1] 58년 증권인생의 교훈, 모든 '파동'은 신뢰를 어긴 대가

[편집자주]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앞으로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 1000을 돌파한 1989년 3월31일 옥외전광판 모습(왼쪽). 하지만 1년 후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증권업협회는 자발적인 노력으로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출범시켰다. 90년 5월4일 현판을 거는 필자(왼쪽)와 배창모 증권업협회 부회장.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 1000을 돌파한 1989년 3월31일 옥외전광판 모습(왼쪽). 하지만 1년 후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증권업협회는 자발적인 노력으로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출범시켰다. 90년 5월4일 현판을 거는 필자(왼쪽)와 배창모 증권업협회 부회장.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이 철칙을 잊은 적이 없다. 사실 증권시장만큼 이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곳도 없는데, 주식이 됐든 채권이 됐든 모든 유가증권 거래는 그 매매계약이 최종 결제일에 약속한 대로 이행될 것을 믿고 거래하는 것이다. 만일 거래 상대방이 이행하지 못하면 거래소가 대신 이행해야 한다. 이런 신뢰가 깨지면 거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내가 증권업계에 투신한 지 올해로 58년째를 맞는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파동을 지켜봤다. 사상 초유의 수도결제 불이행 사태였던 1962년의 '5월 파동'을 비롯해 1971년의 '증금주(證金株) 파동' 등 우리나라 증권시장을 뒤흔든 모든 파동들은 실은 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생긴 것이었다. 약속을 지켜야 신뢰가 생기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분수를 알아야 한다. 무리를 하면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는 것이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잘 넘어간 것 같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을 기억하지 않으면 반드시 똑같은 시련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증권시장이 주는 교훈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굳이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 그 과정과 전말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도 시장이 주는 교훈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겪은 큰 시련인 1990년의 주가 폭락 사태와 소위 깡통계좌 정리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본시 내 평소 소신은 주가란 시장에 맡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증권업협회장으로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그때는 증시 불개입 원칙을 고수하던 정부가 각종 대책을 내놓았으나 백약이 무효한 상황이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1989년 3월31일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 1000을 돌파했다.(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1989년 3월31일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 1000을 돌파했다.(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1000 찍었던 주가 688 급락··· 1990년 증시에 무슨 일이?

내가 증권업협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1990년 3월30일, 여의도 윤중로의 벚나무들이 새봄을 맞아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할 때였다. 하지만 여의도 증권가의 분위기는 봄소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 1년 전인 1989년 3월31일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 1000을 돌파할 때는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거침없는 상승세를 반겼는데 이제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가 1989년 소위 '12·12'조치라는 극약처방을 내놓아 겨우 종합주가지수 800선을 지켜냈지만 그나마 4월 들어서는 이마저도 내주고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

증권업협회장 취임 인사차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각계 인사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의견을 들어보니 다들 큰일이라고 했다. 당장 무슨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주식시장이 붕괴될 수도 있겠다고 걱정했다. 협회에서는 매일 증권사 사장들과 함께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단기적인 반짝 부양책보다 장기적인 증시 안정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증시 활황기 때 증권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조달한 상장기업들이 이제 그 혜택을 투자자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즈음 주가가 연일 하락세를 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3저 호황을 구가했던 기업경기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부동산 투기로 시중자금이 아파트 청약과 땅 사재기에 쏠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인데, 공급이 넘쳐났던 것이다.

1986년부터 89년 사이 많은 기업들이 신규 공모와 유상증자로 주식시장에서 엄청난 금액을 조달했다. 특히 무의결권 우선주를 무더기로 발행했는데, 증시가 활황을 구가할 때라 투자자들은 무조건 사들였다. 공모주든 유상증자든 주식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수하던 시절이었다. 1989년 한 해에만 기업공개로 3조510억원, 유상증자로 11조1245억원 해서 모두 14조원 넘는 돈을 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가져갔고 유상증자의 35.8%에 달하는 4조원이 무의결권 우선주를 발행해서 조달한 것이었다.

이처럼 공급이 넘쳐났으니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한 가지뿐이었다. 수요를 늘리는 것인데, 나는 과거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증권시장안정기금(이하 증안기금)을 조성해 시장의 붕괴를 막아내는 게 급선무라고 보았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 초 주식시장이 침체의 늪에 빠지자 1964년과 1965년 일본공동증권과 증권보유조합을 잇따라 설립해 도쿄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5.1%를 흡수한 적이 있었다.

증안기금도 처음에는 주식보유조합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다들 기금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했지만 워낙 어려운 시기다보니 몇몇 회사에서 출자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나는 증권회사 사장들을 상대로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우리가 앞장서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느냐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우선 25개 증권사가 2조원을 출연하기로 하고 4월25일 열린 협회 이사회에서 증안기금 설립을 결의했다.

그러나 증권회사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은행과 보험회사들도 참여시켜야 했고 주요 상장기업들도 하나씩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당시 국내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 기업이었던 한국전력 안병화 사장을 만나 증권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놨다. 그렇게 발로 뛰어다니며 사정하고 호소하고 끌어들인 끝에 4조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다.

◇ ADB 총회갔던 재무부장관 급거 귀국, 대책회의 까지

그러는 와중에 주식시장은 아주 급박하게 돌아갔다. 4월26일 3.84%나 떨어졌던 종합주가지수가 4월30일에는 사상 최대 낙폭을 기록하며 4.40%나 폭락해 688.66으로 마감했다. 급기야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인도 뉴델리에 가 있던 정영의 재무부 장관이 기조연설만 마친 채 급거 귀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국회에서는 이런 상황에 주무 장관이 외유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질타했고, 정부에서도 4월30일 심야에 긴급 경제장관회의를 연 상황이었다.

정 장관은 귀국하자마자 재무부에서 증시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나는 업계 대표로 참석해 증안기금 조성문제를 보고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하기로 해 우선 2조원을 조성하려고 했던 기금을 4조원으로 크게 늘렸다. 증권회사에서 2조원, 은행과 보험회사가 각각 5000억원, 나머지 상장회사가 1조원을 출연하기로 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90조원이 채 안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증안기금이 5월4일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 출범하자 그 즉시 2500억원을 조성해 5월8일에 은행주와 대형 제조업체 주식을 중심으로 매수에 나섰다. 증안기금은 5월 중에 1조원, 7월에는 2조원을 조성했고 시장 안정을 위한 주식 매수도 꾸준히 이뤄져 7월14일에는 주식 매수액이 1조원을 돌파했다.

증안기금 운용은 처음에는 윤정용 증권업협회 전무가 운용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하다가 7월30일 운용위원회를 확대 개편하면서 이근수 한국투자신탁 부사장이 운용위원장을 맡았다. 이근수 위원장은 재무부에도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는데, 아무 잡음 없이 무난하게 기금을 운용해나갔다. 이때 운용위원을 7명에서 12명으로 늘리는 한편 기금 운용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학계 인사도 참여시켜 임익순 연세대 교수를 영입했다.

◇ 발로뛰어 만든 '4조 증안기금'··· '강성진 주가' 오해받았지만 지금봐도 '잘한 일'

그 무렵 항간에는 '강성진 주가'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증안기금을 조성하기 전에 주가지수를 최대한 떨어뜨려 증안기금이 매수했을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 했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데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절박했던 시절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주가란 기본적으로 기업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고, 증권 시세는 원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장의 대세는 일단 기울면 무엇으로도 그 흐름을 막아낼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시장에 개입한 것은 너무 급하게 떨어질 경우 자칫 시장이 붕괴될 우려도 있고 나중에 회복 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긴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다.

증안기금은 지금 돌아봐도 잘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무엇보다 증권업협회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장의 안정판을 마련했다는 것 자체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물론 지금 같으면 이런 기금을 조성한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선진화하고 성장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숱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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