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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라는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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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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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2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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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 정순왕후··· 66세 왕에게 시집간 15세 왕비

정조라는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 정순왕후
한국 사극에서 정조만큼 자주 등장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못다 이룬 개혁의 꿈은 그를 드라마틱한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런데 정조를 돋보이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는 숙명의 적이었던 정순왕후다.

개봉을 앞둔 영화 '역린'에서는 배우 한지민이 정순왕후 역을 맡았다. 과거 드라마 '이산'에서 정순왕후는 '악의 축'으로 그려졌다. 정조를 둘러싼 모든 음모의 배후에 그녀가 있었다. '역린'은 정조 1년(1777년)에 벌어진 존현각 암살미수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정순왕후가 선보일까. 시간이 한정된 만큼 좀 더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캐릭터가 기대된다.

정순왕후는 1759년 15세의 나이로 66세인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영조는 집권당인 노론에 빚을 진 임금이었다. 그는 소론의 왕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직후 노론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게다가 즉위 초에 소론과 남인이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다가 씨가 마르는 바람에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영조가 탕평책을 쓴 이유가 여기 있다. 왕으로서는 노론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다. 계비도 노론집안이지만 벼슬을 하지 않은 김한구의 어린 딸을 택했다.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하고 당찼다고 한다. 간택 자리에서 방석을 치우고 앉았는데 그 까닭을 묻자 방석에 아비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 점수를 땄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인심이요, 제일 좋아하는 꽃은 옷감의 재료인 목화라고 말한 것도 모범답안이다. 뿐만 아니라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당돌하게도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단다.

그럼 궁궐로 들어간 정순왕후는 어쩌다가 정조와 악연을 맺었을까? 사극에서는 흔히 1762년에 벌어진 임오화변, 즉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그 계기로 본다. 사실 영조의 정비인 정순왕후에게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세자는 숙명적인 걸림돌이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임오화변에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임오화변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형조 청지기 나경언의 고변서였다. 사도세자가 몰래 평안도에 다녀온 일을 역모라고 고발했다. 이는 노론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일이다. 당시 집권당 노론의 실력자는 사도세자의 장인인 외척 홍봉한이었다. 이에 비외척 계열인 김상로, 홍계희와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등이 소외감을 느끼고 일을 꾸민 것이다. 비록 정순왕후의 집안이 가담했지만 본질은 홍봉한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당권투쟁이었다.

문제는 홍봉한의 처세였다. 그러잖아도 소론을 옹호하는 세자가 못마땅했는데 손 안의 권력마저 위태로워지자 그는 사위를 버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 무렵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엄한 처벌을 권하고, 혜경궁 홍씨가 남편에 대한 가혹한 처분에도 침묵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뒤주를 가져온 장본인도 홍봉한이었다. 세자를 희생시키는 대신 세손(정조)이라도 건사해 조정과 궁중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세손은 아버지의 죽음을 묵인한 외가 풍산 홍씨에 대해 사무친 한을 품었을 것이다.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게 사람마음이다. 영조 집권 말기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이 화완옹주, 정후겸과 함께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으려 한 것도 그래서다. 그들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피붙이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맞서 세손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입지를 다진 정순왕후의 지지를 얻어 난관을 극복한다.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세손이 임금이 된 후 즉위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대비의 오빠까지 유배 보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혜경궁 홍씨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죄목. 혹시 임오화변의 원죄를 물은 것일까? 허나 유능한 군주는 사사로운 원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정조는 아마도 조선최대 붕당인 노론이 외척의 손에 놀아나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얻은 교훈일 터.

하지만 정순왕후도 만만하게 볼 정치인이 아니었다. 정조의 집권기에 노론은 왕에게 협조적인 시파와 왕권 강화에 반대하는 벽파로 나뉘며 대립했고 정순왕후는 벽파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했다. 1800년 정조가 급서하고 어린 세자(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여주'(女主)로서 수렴청정에 나선다. 신유박해의 피바람 속에서 정약용 등 정조가 키운 인재들은 숙청되었고, 국왕의 군대 장용영도 폐지되었다. 조선은 그렇게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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