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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진의 증권반세기] 증권가의 제왕, 시장 쥐락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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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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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4) '증권가의 풍운아' 윤응상씨

[편집자주]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무리한 욕심에 몰락의 길 자초…5월 파동의 회오리는 몰려오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지나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고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탈이 난다. 무슨 일이든 무리를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내가 증권업계에 입문한 이래 단 한순간도 잊지 않은 가르침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동명증권 상무 시절 고객으로서 처음 만난 윤응상씨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도 이 교훈이다.

증권거래소 입회장에서 각 증권사의 시장대리인들이 손짓으로 거래하는 모습.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증권거래소 입회장에서 각 증권사의 시장대리인들이 손짓으로 거래하는 모습.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먼저 윤응상씨를 만날 무렵의 상황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동명증권을 맡아 경영했던 시절은 그저 하루하루 회사를 꾸려나가느라 바빴다. 당시 동명증권은 명동 증권거래소 뒤에 있는 메트로호텔 옆 건물에 있었는데, 직원이라고 해봐야 다해서 열명 남짓이었다. 거래소에 나가 입회장에서 주문을 처리하는 시장대리인이 있었고 회사 안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과 경리직원, 현물을 취급하고 주문을 전달해주는 직원 정도만 있으면 됐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거래소에 나가 회사 대표 자격으로 입회장에 들어갔다. 당시 다른 증권회사에서는 이렇게 사장이 입회장까지 직접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나는 우리 회사 시장대리인의 뒤편에 서서 직접 사라 팔라는 지시를 했다. 삼보증권 사장 시절에도 계속해서 입회장에 나갔는데 내가 굳이 이렇게 현장에 나가 매매 지시를 내린 이유는 고객 주문을 미리 알려주면 기밀이 샐 수 있는 데다 회사의 자기매매 주문은 그때그때 시장흐름과 분위기에 따라 판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거래소가 개장하는 아침 10시부터 낮 12시까지, 또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입회장에서 시장대리인과 함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장 돌아가는 걸 현장에서 직접 챙기다보니 자연히 감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영업도 열심히 해서 동명증권 인수 후 첫해인 1959년부터 거래실적 1위를 기록해 우수 증권사 표창을 받았다. 그해 7월의 약정고를 보면 증권사 전체 약정대금이 60억3000만환이었는데 동명증권이 6억1071만환으로 2위 성남증권의 4억6761만환을 크게 앞질렀다. 게다가 50여개 증권사가 난립했던 그 무렵 10%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한 것도 놀라운 실적이다.

이처럼 출범 1년도 채 안돼 업계 선두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동아건설에서 주문한 일종의 자기매매 물량이 많았던 게 결정적이었지만 나름대로 고객유치와 실적제고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일화로 들어주기 바란다.

당시 증권거래는 채권이 주종이었으나 거래소에서 실제 매매가 이뤄지는 물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인허가 받을 때 강제로 인수한 물량이라 증권회사에서 거래하기보다 그저 수집상들에게 내다파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길거리 채권장수들을 불러모아 그날그날 수집한 채권물량을 무조건 나한테 가져오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길거리에서 유통되던 소량의 채권들을 한데 모아 매수한 다음 일부를 고객들에게 싼값에 나눠주기도 했다.

이렇게 고객을 유치하면서 열심히 뛰고 있는데 안명수라는 시장대리인이 윤응상씨를 소개했다. 윤씨는 일본 유학파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나이는 나보다 열두 살쯤 많았는데, 호탕한 성격에 인품이나 매너가 워낙 좋은 데다 말도 근사하게 잘해서 젊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금방 반했다. 그 시절 사나이다운 호기도 부릴 줄 알아서 술집에 가면 팁으로 지폐 한두 장이 아니라 아예 돈다발을 뿌렸다고 할 정도였다. 윤씨는 군부 실력자였던 김창룡 특무부대장과 원용덕 장군 등과의 친분을 배경으로 동양통신의 발행인으로 있다가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씨에게 동양통신을 넘기고 1955년에 한일증권을 인수하는 등 증권가에는 대단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상태였다.

'파동을 몰고다니는 사나이' 윤응상… 인수-설립한 증권사만 10곳 넘어
잇단 파산-폐업 불구 오뚝이처럼 재기… 동명증권 고객으로 만나 '질긴 인연'


윤씨는 내가 만나기 전인 1958년에 1·16 국채파동으로 한일증권이 파산하면서 채권자에게 쫓기는 등 이미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시작한 터였다. 그러나 워낙 수완이 좋아 무너졌다가도 금세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증권가의 풍운아'답게 새로운 파동을 몰고 왔다.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윤씨가 인수했거나 설립한 증권사만 줄잡아 10여개사에 달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파동에 휩쓸려 파산하거나 강제로 문을 닫았다.

내가 처음 만났을 무렵에도 윤씨는 경희증권을 새로 인수해 사촌동생에게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고문으로 있으면서 여러 증권회사에 계좌를 트고 작전을 벌일 때였다. 아무튼 윤씨는 내 젊은 패기를 높이 샀는지 동명증권에 제일 많은 주문을 몰아줬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액거래를 하는 고객을 얼마나 많이 유치하느냐가 증권회사의 영업 실적을 좌우하는데 윤씨는 그야말로 큰손 고객이었으니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윤씨와의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 중 하나가 그로 인해 비롯된다.

윤씨는 머리회전이 빠르고 아는 것도 많아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맞는 것도 꽤 있었다. 다만 너무 허황되다는 게 문제였다. 가령 증권시장의 중심은 채권이 아니라 주식이라는 말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증권거래소를 자기 수중에 넣어 시장을 장악하려 한다든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한 매수작전을 펴고, 무조건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공매도 공세를 감행하는 식의 행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윤응상씨의 이 같은 무리한 행동으로 인해 내가 곤욕을 치른 것은 1962년 2월 한전주 책동전에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윤씨로 인해 난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윤씨가 자기 주식이라고 맡기고서는 팔아버렸는데 뒤늦게 이 아무개라는 고객이 찾아와 그 주식이 자기 것이라며 나에게 책임지라고 해서 어렵게 화해하고 끝낸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그 무렵 동명증권은 동아건설의 매매를 비롯해 주로 매수주문을 많이 처리해 시장에서는 매수측(매방, 買方) 증권회사로 통했는데, 이때는 윤씨의 공매도로 인해 정반대 입장(賣方)이 돼 버렸다.

무모한 공매도 공세 주가 6배 치솟아 불도불이행 사태 벌어질까 밤잠 설쳐
드디어 결제일, 은행 끝난 오후5시… 허겁지겁 주식뭉치 들고와 겨우 수습


당시 한전 주는 액면가가 1만환으로 1961년 11월까지 액면가 수준에 거래됐다. 전체 발행주식은 383만주에 달했지만 대부분 정부기관에서 보유해 실제 유통물량은 10만주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거래가 별로 없었는데 농협에서 공매하려다 팔지 못한 물량 12만주를 일부 증권회사에서 매각 위임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증권가의 '풍운아'로 불렸던 윤응상 씨는 그야말로 파동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사진은 5월 파동 관련자들의 군법회의 공판 장면(앞줄 맨 왼쪽이 윤 씨).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증권가의 '풍운아'로 불렸던 윤응상 씨는 그야말로 파동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사진은 5월 파동 관련자들의 군법회의 공판 장면(앞줄 맨 왼쪽이 윤 씨).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매각 위임을 받은 회사들이 한전주 주가를 끌어올리자 윤씨가 갖고 있지도 않은 한전 주식을 공매도하기 시작한 것인데, 상황을 아는 나로서는 이건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윤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윤씨는 당시 나름대로의 계산을 갖고 공매도를 한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윤씨다운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었다.

윤씨는 계속해서 팔아댔고 시장에 나올 만한 한전주 물량을 수중에 확보하고 있는 매수측 회사들도 이에 맞서 계속 사들였다. 한전주 주가는 계속 올라가 6만환까지 치솟았다. 그러자 시장에서는 동명증권이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런 가운데 수도(受渡) 결제일이 점차 다가오자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윤씨 측 주문을 처리해준 것이지만 나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수도결제가 이뤄질 수 있을까. 만일 수도불이행 사태가 벌어진다면 무슨 일이 닥칠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수도 결제일 아침이 밝아왔다. 나는 전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운 터라 초췌한 모습으로 회사에서 윤씨 측 연락을 기다렸다. 오전이 그대로 지나갔다. 이제는 틀렸구나 싶었다. 지난 시간 열심히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윤씨의 무모한 공매도 공세를 더 강력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수도 결제일 마감시간이 다 끝나고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나서야, 그러니까 은행 마감시간도 지난 오후 5시나 됐을까 해서 윤씨 측 사람이 한아름의 주식 뭉치를 들고 허겁지겁 거래소로 달려왔다. 얼마나 기뻤는지, 정말 얼마나 속이 탔겠는가. 이렇게 해서 내가 가슴 졸여야 했던 한전주 책동전은 겨우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윤응상씨는 더 큰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5월 파동이라는 소용돌이를 몰고 올 대증주(大證株) 책동전이었다. (5회는 '5월 파동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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