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의 시조…저주받은 걸작 15년만에 부활하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간 나머지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된 '저주받은 걸작' 게임이 있다. '유희왕'에게 영감을 주었던 '네트러너'. 오랜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걸작들이 늘 그래왔듯,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아 15년 만에 부활에 성공했다.



만화 ‘공각기동대’는 뇌를 전자 장비로 대체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데이터 교류기술과 전자뇌를 대상으로 한 해킹 범죄, 넷(internet) 상에서 가상현실처럼 존재하는 인간 등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이며, 이후 매트릭스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




물론 이들 작품 전에는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와 그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었다. (시대를 앞서 간 작품이란 게 늘 그렇듯, 이 작품들은 대개 흥행에서 실패했다. 당시 블레이드 러너는 평론가들에게 ‘시간 낭비’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블레이드 러너를 비난하는 영화인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보드게임 중에도 컴퓨터와 인체를 연결해 넷 상의 가상현실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 기괴한 주제를 멋지게 구현했지만, 역시 시대를 앞서 갔기 때문에 저주받은 걸작이 된 작품이 있다. 바로 1996년 작품 ‘네트러너(Netrunner)’다.



TCG 날림 이해…'유희왕'의 원조는?

네트러너는 미국의 게임 작가 리처드 가필드가 1996년에 발표한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하 TCG)이다. TCG는 무작위 카드를 모아서 사용할 카드를 선별해 자신의 전략을 집대성한 카드 더미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대결을 펼치는 형식의 게임이다. 그리고 이 장르의 시작은 바로 리처드 가필드가 만든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 1993)’이다.




TCG는 많은 카드가 발매되고 카드 밸런스가 절묘해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전략을 짤 수 있어서 팬들에게 크게 호감을 사고 있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장르다. 1993년 발매 이후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TCG 장르를 선도하는 매직 더 개더링이 그런 작품이다.
‘유희왕’은 매직 더 개더링의 오마주 만화로 시작해서 TCG 제품이 나오고 이후 매직 더 개더링을 압도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특히 무작위로 제품을 구매하는 방식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카드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제품을 사게 만든다. 이 때문에 명작 TCG의 일부 카드는 프리미엄이 붙고, 거래가 활성화되는 2차 경제가 형성되기도 한다.


네트러너의 배경 이야기




네트러너의 배경은 미래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기업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자금 계획이 있어서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신개념 해커 러너들은 인체를 기업 서버에 연결해 침투하고, 기업 비밀을 폭로하며 막대한 자금 피해를 주고 있다.

이 게임은 '기업'과 '러너'의 두 진영으로 나뉘며, 기업은 방어하고 러너는 침투하는 ‘비대칭형 게임’이다. 기업은 자금 계획을 실행해 돈을 벌고 이 돈으로 서버에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 러너들의 침투에 대비한다. 충분한 방어벽이 구축되면 비밀 음모를 진행해 점수를 낸다.

러너는 세계 해커들과 인맥을 형성하고 합법/비합법적인 수단으로 돈을 번다. 효율적인 해킹을 하기 위해 장비를 사고, 기업의 보안 프로그램을 무력화할 수 있는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기업 서버에 침투를 감행해 비밀 음모를 빼내고 점수를 낸다.

이 과정에서 먼저 일정 점수에 도달하는 진영이 승리한다. 그 외에 일정 시간이 지났는데 기업이 일정 점수를 내지 못하면 러너가 승리, 침투 중 기업의 함정에 걸리거나 피해 누적으로 러너가 뇌사 상태가 되면 기업 측이 승리한다. (이 러너는 죽을 때까지 기업서버 안의 가상현실에 갇혀서 못 나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실패했다능…

네트러너가 그나마 현역이었던 시기는 나의 군 복무 시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당시는 매직 더 개더링이 처음 상륙하던 때였다. 국내 아날로그 유저들의 관심사도 이쪽이었고 그나마 국내에서 제품 구하기 쉬운 것도 이쪽이었다. 그래서 당시 유저들에게 네트러너가 어떤 게임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보면 네트러너는 어두운 미래상, 빅 브라더의 음모, 가상현실 침투, 창과 방패의 비대칭 대결, 보안 프로그램과 해킹 프로그램 등 깨알 같은 설정으로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당시 주류였던 매직 더 개더링보다는 테마도 룰도 어려운 작품이고, 비대칭 게임이기에 밸런스 맞추기도 어려웠다. 다양한 카드로 밸런스를 보완할 기회도 없이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업적으로 실패한 TCG의 말로는 비참하다. 지속적인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후 판본이 발매되지 않고 이 때문에 카드 풀이 줄어든다. 실타래 같은 전략의 다양성도 없어지며 유저는 동시대의 다른 게임을 주로 선택하고 소수 팬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회사 차원에서 돈이 안 되는 사업을 할 이유는 없고 결국 절판 순서를 밟을 수밖에 없다.


저주받은 걸작의 부활

거장 작가로서 리처드 가필드는 자신의 최고 걸작으로 매직 더 개더링보다 네트러너를 꼽곤 했고, 네트러너의 상업적 실패를 아쉬워했다. 시대는 지나며 리차드 가필드의 인터뷰를 읽은 사람이 10년 이상 누적됐다.

어느새 전설의 게임 네트러너를 한번 보고 싶다는 유저들의 열망은 폭발 직전이 됐고, 마침내 미국의 오타쿠 보드게임 전문 기업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에서 2012년 복각판인 ‘안드로이드: 네트러너’를 발매했다.




우려도 있었으나 안드로이드 네트러너는 호평 속에 확장판을 팔며, 최소한 2014년까지 순항 중이다. 뛰어난 작품성에도 때를 타지 못한 저주받은 걸작은 15년이 지나서야 ‘저주받은’의 꼬리표를 떼고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7월 17일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