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할머니 경대 서랍 속 '귀한 몸'

횡성군 토종종자 실태조사. /사진제공=한영미, 언니네텃밭

"내 언제 다시 씨앗을 주노? 왔을 때 가져가"


여든네 살 박부례 할머니는 경대 서랍에서 토종 청갓이라며 봉지를 꺼냈다. 할머니의 봉지를 펼친 후 한영미 씨의 눈에 들어온 건 쭉정이들과 흙이었다. 한 씨는 봉지를 잘 여며 집어넣었다. 할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 씨앗을 채종했을지 느껴졌다.

사회적기업 '언니네텃밭'의 횡성오산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씨는 올해 봄 횡성군과 함께 토종씨앗 보유 현황을 조사하고 토종씨앗을 채종하느라 박 할머니를 처음 찾아갔다. 할머니는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이 떠난 '새댁'을 위해 곡괭이처럼 휜 허리로 밭에서 흙가루 같이 작은 청갓 씨앗을 주웠을 것이다.

"횡성에서 살아온 토종씨앗은 할머니들의 삶과 이어져요. 할머니들이 씨앗을 지키는 이유는 다 달라요. 뿌리 번식을 하는 꽈리는 감기에 약이 되니까, 돼지감자(자주감자)는 전분이 많이 나오니까, 토종찰옥수수는 손주가 잘 먹으니까."

그는 "박 할머니 덕분에 토종 긴호박, 둥근호박, 물고구마 씨앗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며 "우리는 할머니들의 이런 씨앗을 찾아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심고 가꿀 수 있도록 토종씨앗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할머니 경대 속 씨앗이 귀한 이유＝ 언니네텃밭(sistersgarden.org)에선 한씨 같은 여성농민 14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2009년 4월 강원도 횡성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전국 17개 (농사)공동체로 늘었다. 언니네텃밭 홍보팀의 김도영 팀장은 "언니네 텃밭은 여성농민의 자립이 최종목표"라며 "동시에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식량주권을 실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부례 할머니는 강원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에서 토종마늘과 토종물고구마 농사를 짓고 계신다. /사진제공 및 설명=한영미, 언니네텃밭

언니네텃밭은 이를 위해 △자급적이고 친환경적인 농사로 변화 △생산자와 소비자가 관계 맺는 유통으로 변화 △식탁의 변화 등 3가지 변화를 추구한다. 이는 △제철꾸러미사업 △언니네장터 △토종씨앗 살리기 등과 같은 사업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니네텃밭이 다른 친환경유통업체와 가장 큰 차이는 토종씨앗 살리기 사업에 있다. 1년에 1만원의 기부로 한 씨나 박 할머니처럼 토종씨앗을 살리려는 농민들의 조사, 채종 활동을 도울 수 있다. 기부자는 매년 봄 토종 씨앗 3가지를 받을 수 있다.
토종씨앗은 그것이 땅과 기후에 맞게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낸 저항력을 갖추고 있다. 농민들은 올해 농사를 마치면 내년 농사를 위해 직접 씨앗을 받아 심었다.

그러나 농업이 산업화되면서 동일한 품질과 맛을 내기 위해 기업이 파는 씨앗을 심게 되었고, 기업이 시장을 장악한 씨앗의 가격은 농민과 소비자의 통제권을 떠난다.
또 하나의 이슈는 GMO 즉 유전자변형농산물로부터의 자유가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김은진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GMO 재배가 허용되지 않는 한국에서도 26곳에서 GMO 작물이 나왔다"며 "몬산토 주장과 달리 GMO종자가 의도치 않게 어디에서든 자랄 수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토종종자를 지키는 건 유전자변형물질을 먹지 않을 권리, 내 밥상에 올릴 먹을거리를 내가 결정할 권리와 연결된다. 중요한 얘기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한테 쉽게 전하기엔 어려운 얘기다. 언니네 텃밭은 이걸 어찌 전할까.

◇얼굴 있는 농산물이 '친사회'＝ 언니네텃밭은 생산자 방문, 꾸러미서비스, 언니네장터를 통해 도시의 소비자와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언니네텃밭 소비자는 1년에 한 번 생산지를 방문한다. 봄에는 여성농민과 함께 봄나물을 캐고 씨를 뿌린다. 겨울에는 김치를 담그고 메주를 띄운다. 아이들은 씨앗을 심거나 텃밭 일을 하며 자연을 배운다.

김 팀장은 "단순히 친환경으로 키운다고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아진다"며 "친환경으로 농사지으면 모양이 예쁘지 않고 크기도 다 달라서 '좋은 게 맞나' 싶지만, 직접 가서 보고 설명을 들으면 좋다는 걸 금새 알게 된다"고 말했다.

언니네 텃밭 소비자들이 생산자 공동체를 방문했다. /사진제공 = 언니네 텃밭

소비자와 생산자는 상품과 서비스를 통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매주 혹은 격주로 제철 먹을거리를 소비자에게 보내주는 '꾸러미서비스'에는 항상 편지가 동봉된다. 편지에는 재배 작물의 이름부터 맛있게 먹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적혀있다.
'두부랑 냉이, 달래, 밀가루를 함께 넣어 계란으로 반죽해서 바삭하게 전을 부쳐 보세요. 색다른 봄맛이 거기 있어요'

꾸러미 상품엔 3~4인 기준의 '제철꾸러미', 1인 기준의 '1인 꾸러미'등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제주도 음식이 궁금하거나 제주도를 고향으로 한 사람들을 위한 '제주고향 꾸러미'도 있다. 배송주기는 매주 혹은 격주 중 선택할 수 있다. 제철꾸러미는 월 4회 기준으로 매월 10만원, 1인 꾸러미는 월 8만 원이다. 제주고향 꾸러미는 격주로 6만 원이다.

온라인쇼핑몰 '언니네 장터'에선 여성농민 100여 명이 잡곡을 비롯해 제철 과일과 채소들을 판다. 세계 각지에서 들여와 형형색색 진열되었지만 누가 어떤 씨앗으로 재배한 것인지 모르는 마트 식품코너와 달리, 언니네장터에선 '얼굴 있는' 먹거리를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자연이 철 따라 주는 것, 내가 사고 싶을 때가 아니라 생산자가 공급할 때 먹어야 한다는 점은 불편하다. 특히 마트와 백화점의 비닐포장 채소에 길들여진 도시 소비자에게는 더 그렇다.

하지만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선택을 하는 건 결국 소비자다. 어느 독일철학자의 말처럼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인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선택한 대로 시장은 형성된다. 그 시장은 다시 사회를 만든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언니네 텃밭 꾸러미 모습. /사진제공 = 언니네 텃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