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의 신년사, “‘종이클립’도 주워서 다시 쓰자”

/그래픽=김현정 디자이너

# “오늘 발표된 전 분기 실적을 보니 매우 만족스럽습니다...그래서 바로 구매부서에 전화해 더 이상 종이클립을 구입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그리고 파란색 종이봉투의 추가 구입도 중단하라고 일렀습니다.”

전 미국의 투자은행 베어스턴스(Bear Stearns)의 CEO겸 이사회 회장이었던 앨런 그린버그(Alan Greenberg)는 재직 시절 월가의 소형 증권사에 불과했던 베어스턴스를 4대 투자은행(IB)의 하나로 키운 월가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아이비리그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처음 월가에 취직하려 했을 때 베어스턴스 외에는 아무데서도 받아주질 않아, 달랑 주급 32.50달러를 받고 보잘 것 없이 시작한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건 그가 CEO로 재직 시절 직원들에게 수시로 보낸 매우 독특하고 유머스런 메모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종이클립’ 메모.

1985년 어느 날 매우 훌륭한 1분기 실적을 보고 받은 그는 놀랍게도 회사의 구매부서에 전화해 사무용품인 ‘종이클립’ 구입을 바로 중단하라고 지시한다. 종이클립은 비용이 아주 적어 모두들 한번 쓰고 쉽게 버리는 일개 소모품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전 분기 매우 뛰어난 영업성과를 내고 잔뜩 상기된 직원들에게 보너스 얘기는 못할망정 쪼잔하게 종이클립이나 아껴 쓰라고 말하다니 모든 직원들은 아마 기가 차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회장이 좀스럽게 무슨 종이클립까지 일일이 간섭하나’란 반발이 나올게 뻔한 줄 알면서도 종이클립 절약을 강조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종이클립을 아껴 쓴다면 지금 있는 종이클립 만으로도 충분히 많아 아마도 외부에 내다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종이클립 뿐만 아니라 사내용 문서 배달에 사용되는 파란색 종이봉투도 재활용해서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당연히 이 봉투의 추가 구입도 중단시켰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대인(大人)은 작은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기 보다는 큰 일을 멀리 내다보고 대범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배웠다. 따라서 그린버그가 만약 한국에서 종이클립을 언급했다면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기업 회장으론 부적격한 좀스런 인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린버그는 그런 조롱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CEO로 재직하는 내내 비용절감을 강조했다. 따라서 1985년 종이클립 메모가 유독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가 1996년에 출판한 『회장의 메모(Memos From The Chairman)』를 보면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20여 년간 줄곧 비용 증가를 경계하며 “독수리와 같이 비용을 감시하라(Watch thy expenses like a hawk)”고 수도 없이 직원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비용 절감에 신경 써야 할 때는 회사가 잘 나갈 때이다. 회사가 좋지 않는 상황에 처한 뒤 비용을 줄이려 하는 것은 멍청이와 운이 없는 사람들만이 하는 짓이다.”고 말하며 회사가 돈을 잘 벌 때 오히려 낭비 요소를 찾아내 제거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1985년 종이클립 메모를 보면, 전 분기에 놀라운 실적을 거둔 뒤라 직원들 모두 자만에 빠지기 쉽고 그러면 종이클립 같은 하찮은 소모품엔 별 신경 안 쓰게 되는 분위기에 젖어들기 쉬움을 그린버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낭비적인 비용 요소는 줄여야 한다는 의식을 직원들에게 재차 각인시키기 위해 종이클립을 언급한 것이다.

작은 눈덩이를 굴리면 점차 커지다 어느 새 큰 덩어리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작은 변화가 커다란 변화를 유발하는 현상을 ‘스노볼 효과(snowball effect)’라 부른다. 이런 현상은 회사 내 비용 낭비 현장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린버그는 스노볼 효과를 잘 알고 있었고, 종이클립과 같이 적은 비용이라 무시하며 절감 활동을 등한시하고 방심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예상치도 못한 큰 비용 낭비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대기업은 저마다 회장의 신년사를 발표한다. 대개 지난해 성과를 평가하면서 직원들의 수고를 위로하고 새해에 추구할 목표를 제시한 후 힘차게 정진하자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요즘은 혁신과 도전,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도 빠짐없이 들어간다.

하지만 비용 낭비에 대한 경계나 주의의 말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회사가 잘 나가든 아니든 거룩한 회장의 신년사에 종이클립 절약과 같은 좀스런 얘기를 한다면 도저히 회장의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정치권도 매한가지다. 이번 주엔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여야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이 뒤를 이었다. 저마다 올해 이룩할 거창한 정책을 제시하지만 정작 물 새듯 새는 수많은 비용 낭비 요소에 대한 통제는 무관심하다.

한때 ‘손톱 밑 가시’를 언급하며 잘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규제 철폐를 강조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젠 ‘종이클립’을 언급하며 물 새듯 새는 낭비적인 비용 요소를 통제할 때다. 특히 올해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는 더욱 그렇다. 회사든 국가든 종이클립 같은 작은 비용 요소를 방치한다면 회사나 국가 전체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음을 경고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