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교수, 3대 와인블로거로 변신…인생 바꾼 200달러짜리 와인은?

와인 전문 블로그 '핑가스의 기억'을 운영하고 있는 장지호씨(47). 손에 든 와인은 그가 '인생 와인'이라고 꼽은 'J. L. CHAVE Hermitage'(장 루이 샤브 에르미타주)다./ 사진=윤준호 기자

"와인은 살아있는 미물. 마치 요물딱지 같다."


기분에 따라 다르고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다르고, 심지어는 어제 마실 때와 오늘 마실 때 맛이 또 다른 와인의 변화무쌍함이 '요물'과 같다는 말이다. 소믈리에나 철학자가 할 법한 이 말은 와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범한 교수의 입에서 나왔다. 서울 모 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만난 장지호 교수(46). 와인 전문 블로그 '핑가스의 기억'을 운영하고 있다. 장 교수는 "마시면 마실수록 모르는 게 와인"이라고 말했다.

◇와인 블로거가 말하는 내 인생을 바꾼 와인, 'J. L. CHAVE Hermitage'

장 교수는 와인 관련 분야에 학식을 쌓은 적이 없다. 오히려 막걸리를 즐겨 마셨고 소주나 맥주라고 가려 먹지도 않았다. 젊은 시절 그에게도 와인은 그저 남들처럼 "쌉싸름한 술" 정도였다. 그러던 그의 삶에서 와인이 '애인'이 된 때는 2009년. 이른바 '인생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장 교수 인생 최고의 와인을 접하면서부터다.

장 교수는 "과히 충격적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책상 밑 와인 냉장고에서 자줏빛 캡실이 인상적인 검은 빛깔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J. L. CHAVE Hermitage'(장 루이 샤브 에르미타주). 장 교수가 해외출장 중 200달러(약 22만5000원)에 손에 쥔 와인이다.


장 교수가 와인에 빠진데 이어 와인 마시기를 본격적인 취미로 삼게 된 것 모두 이 와인이 준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장 교수는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있어도 첫 맛과 끝 맛이 완전히 다른 와인"이라며 "굉장히 거칠면서도 요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다. 매운 음식만 빼고 양식은 물론 한식, 중식 등 안 어울리는 음식이 없다"고 극찬했다. 본인에게 단연 최고의 와인인 만큼 남들에게도 주저없이 추천하는 와인이다.

장 교수가 블로그를 운영하게 된 것도 '장 루이 샤브 에르미타주'를 접한 뒤부터다. 당시 '충격적'이었던 첫 인상을 오랫동안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이후에도 색다른 와인을 맛 볼 때마다 그 순간 느꼈던 감정과 기분을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서 블로그에 끄적였다.

2009년부터 하나둘 포스팅하던 장 교수의 블로그 '핑가스의 기억'은 이제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름난 곳이 됐다. 2013년 기준 포탈사이트 네이버가 선정한 3대 와인 파워블로그 중 하나로 일평균 방문자가 2200여명에 달한다. 누적 방문자만 120만명. 게시된 와인 포스팅은 무려 1600개에 달한다.

블로그 '핑가스의 기억'에 올라온 1600여개 와인 리뷰 중 상당수는 '맛이 없다'고 평가돼 있다. 그만큼 장씨는 솔직한 블로거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핑가스의 기억'

◇"블로그는 막걸리처럼 편하게"

"맛이 없으면 없다고 말하는 솔직담백한 리뷰가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죠."

장 교수가 설명하는 파워블로그 선정의 '비결'이자 '무기'다.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내뱉었던 게 다른 블로거들의 발길을 모았다. 장 교수에게 블로그는 지극히 자기 자신을 위한 공간, 일종의 '일기장'이었던 셈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도 신경쓰지 않았다. 와인에 대한 기계적인 평가를 절대로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하루 4~5건씩 오는 주류업계의 협찬이나 홍보 요구에도 응하지 않은 이유다.

솔직담백함으로 인기를 얻어 3대 와인 파워블로그에 올랐던 장 교수가 올해는 파워블로그를 스스로 포기했다. 파워블로그가 장 교수에게 독이 돼서다. 어느 순간부터 블로그에 올리기 위한 와인을 먹고 있었고, 본인 말 한 마디가 '파워'를 갖게 되면서 예전 만큼 하고 싶은 말도 못하게 됐다.

하루 3~4개씩 올리던 포스팅은 이제 많아 봐야 하루 1개 정도다. 게시물이 줄면서 방문자수도 줄었지만 파워블로그에서 '파워'를 떼낸 지금, 장씨는 비로소 와인과도 다시 '애인'이 됐다. 예전처럼 와인을 취미로 대할 수 있게 됐다.

"와인도 막걸리처럼 편한 술이예요. 블로그도 지극히 그런 것이죠". 장 교수는 기자와 만난 뒤 퇴근길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 밥상에 올릴 와인 한 병을 구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