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책통]작가들의 장기 독점 계약이 갖는 의미

“오늘의 작가상 심사 당시 ‘사람의 아들’을 놓고 심사위원들 사이에 과도한 관념과 추리 부분의 허점이 지적됐다. 수상작 선정이 무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작품을 읽어보았는데 아하스페르츠가 나오는 종교 논쟁 부분은 지나치게 길어서 이야기 전개로서는 다소 무리한 감이 있었지만 문장도 아취가 있고 상당히 격조가 높은 데다 빠른 속도로 읽혀 오히려 독자들의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작가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가작으로 하자는 것을 그냥 당선작으로 발표해 버렸다.”


박맹호 회장이 자서전 ‘책’에서 털어놓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탄생비화다. 1980년대에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황제를 위하여’ 등의 화제작을 꾸준히 내놓은 이문열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민음사가 존재할까? 출판사가 이렇게 당대를 대표하는 저자를 발굴하고 그 작가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하지만 이문열 또한 민음사와 탁월한 출판기획자 박맹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그가 있을까? 박 회장은 등단한 지 3년 남짓한 신인 이문열에게 한글세대 독자들에게 맞는 문체와 서사를 갖춘 ‘삼국지’가 필요하다며 ‘경향신문’에 ‘삼국지’를 연재할 것을 제안했다. 뜨악한 표정을 짓는 이문열을 설득하기 위해 경향신문에 파격적인 요구를 관철시킨 덕분에 ‘삼국지’는 1800만 부 이상 팔리며 건국 이래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삼국지’로 민음사가 대형 출판사가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외국문학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출판사 중 하나인 ‘열린책들’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밀리언셀러에 올라 그는 한국독자들에게 가장 사랑하는 작가에 오르기도 했다. 한 작가가 구축한 세계 전체를 보여주려는 열린책들의 ‘전작주의’는 유명하다. 1986년 ‘장미의 이름’을 시작으로 39종 46권의 책을 펴낸 움베르토 에코, 1996년에 ‘좀머씨 이야기’ 열풍을 일으킨 파트리크 쥐스킨트 등의 저자들 책 모두를 독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행운이었다. 이 전작주의야말로 오늘의 열린책들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문학동네는 김훈, 김영하, 김연수 등의 작가와 파격적인 조건으로 장기 독점 계약을 맺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주요 문학출판사를 전전하며 책을 펴내는 걸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에서 이런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과거의 풍토에서는 출판사가 작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가 없었다. 앞으로 유망한 신인에게도 이런 파격적인 계약이 이뤄지고 실제로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래도 우리 문학의 밝은 미래를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느 유명작가처럼 사적인 이유로 전속계약을 파기해 스스로 망가지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