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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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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8.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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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코너-김언종 고려대 교수]8월호

제목을 읽은 독자라면, 이제는 세상이 다 아는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집대성자요 퇴계 이황(李滉), 율곡 이이(李珥)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학자로 칭송되기도 하는 정약용(丁若鏞) 선생을 떠올릴 것이다.
맞다. 사실 선생이 선호(選好)한 호(號)는 ‘다산’이 아니다. 당대(當代)는 포기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은 ‘사암(俟菴)’이라 짓고 이를 기억해 주길 바라셨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꿈’이라면, 8백여 만 백성들은 물론이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병들었던 당시의 조선왕조를 도탄(塗炭)에서 구하기 위한 선생의 ‘원대한 이상’을 떠올리시겠지만 실망스럽게도 그게 아니다. 나는 선생이 주무시다 꾼 한 자락 꿈을 말하려 한다.
전라도 남쪽 끝자락의 어촌(漁村) 마을인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시작한 지 7년째인 1808년, 선생은 한창 나이인 47세였다. 그해 음력 11월 6일 겨울 밤, 선생이 지금의 동암(東庵: 지금 다산초당 오른편의 ‘茶山東菴다산동암’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집이다.)에서 혼자 주무시는데 한 예쁘장한 여인이 나타나 은근 슬쩍 추파를 던지는 것이었다. 꿈이었음이 한스러웠으리라. 얼마나 예쁜 여인이었을까? 선생은 시의 서문에서는 그냥 일주(一姝) 즉 ‘한 예쁜 여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시에서 그녀가 백설이 애애(皚皚)하게 덮인 산 계곡 깊숙한 곳에 외로이 피어나 향기를 풍기는 매화보다 더 예뻤다고 하셨으니 단순호치(丹脣皓齒)에 설부화용(雪膚花容)의 절세미녀(絶世美女)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른바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난 1801년, 2월 9일에 의금부(義禁府)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그로부터 18일 후인 2월 27일에 경상도 영일의 장기현(長鬐縣)으로 첫 귀양을 떠난 것이 나이 마흔에 들던 때였으니 선생은벌써 8년 가까이 여인의 지분(脂粉)은 커녕 아내의 몸냄새조차 맡아보지 못한 생홀아비 신세였던 것이다. 그러니 돌부처가 아닌 선생이 어찌 부동심(不動心)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선생은 자못 감성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젊었을 때, 인간의 이성(理性)을 중시하던 정주학적(程朱學的) 분위기에 싸여있던 선생이 정주학과는 달리 신성(神性)을 중시하는 천주교 신앙에 쉽게 빠졌던 것도 선생의 성정(性情)을 짐작하게 해준다.
체면상 죽부인(竹夫人) 한 토막도 방구석에 둘 수 없는 귀양객에게 제 발로 찾아온 이 절세미녀를 안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를 몽롱한 상황 속에서 선생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큰 죄(?)를 짓고 귀양살이 하고 있는 죄수의 몸인데 어찌 잠시나마 음욕(淫慾)에 몸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선생은 황홀경(怳惚境) 속에서 정신을 다잡은 다음, 간곡히 거절하고 그녀를 돌려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청객이지만 엄연히 손님인 그녀를 어찌 맨손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당대의 저명 시인이기도 했던 선생은 이에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를 지어 그녀에게 준다. 그녀와 아린 이별을 하고 잠에서 깨고 보니 한바탕 허망한 꿈! 우리는 이제부터 이런 허망함을 동암일몽(東菴一夢)이라 부르자.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였으므로 선생은 일어나 앉아 호롱불 밝히고 지필묵(紙筆墨)을 꺼내어 꿈속에 지은 시를 적어 두었다.

눈 덮인 산 계곡의 한 송이 매화인들 雪山深處一枝花
붉은 깁에 싸인 복사꽃만 하랴마는 爭似緋桃護絳紗
이 내 마음 이미 금강철이 되었으니 此心已作金剛鐵
풍로가 있다한들 너를 어쩌겠는가 縱有風爐奈汝何

그녀가 얼마나 예뻤으면 눈 덮인 산 깊은 계곡에 홀로 피어 짙은 향기를 뿜고 있는 설중매(雪中梅)보다 더 낫다고 하였을까? 하긴 ‘매화’가 아무리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하더라도 제 발로 찾아온 눈앞의 ‘복사꽃’ 보다 대견할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몸매 또한 수면을 차고 날아오르는 제비 아닌가. 그녀의 살결은 당연히 발그레한 복숭앗빛, 그것도 속이 비치는 진홍색 엷은 깁으로 감싸고 있는. 혹 선생의 눈에 그녀의 볼록한 가슴과 붉은 복숭아가 겹쳐 보인 건 아닐까?
부둥켜안고 얼음 위 눈밭에라도 뒹굴고 싶은 욕정이온몸을 데우는 순간, 선생은 8년이 가깝도록 고향 집에서 독수공방(獨守空房) 하고 있을 아내 홍씨(洪氏)를 떠올린다. 게다가 아내는 무장(武將)인 장인 홍화보(洪和輔)를 닮아 강단(剛斷)있는 여인이었다. 천주학에 열심이던 남편 정약종(丁若鍾)이 서소문(西小門) 형장에서 죽임을 당한 뒤 살기 어렵자 어린 남매 하상(夏祥)과 정혜(情惠)를 데리고 찾아 왔던 윗동서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돌려세운 그녀가 아니었던가. 강진에 온 지 서너해가 되었을 때 아내는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 여섯 폭을 보내 왔다. 꿈결 같았던 시절 잊지 말고 언젠가는 끝날 고생을 참고 견디자는 뜻을 담았겠지만 ‘나 외의 여자 생각일랑 아예 마소’라는 경고를 담았음을 모를 선생이 아니다.
바람피우다 아내에게 들킨 유부남처럼 꿈에서도 정신이 번쩍 든 선생은 서둘러 상황을 수습한다. 그리하여 과연 진심인지 궁금한 변명 조의 말을 누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다. “여인이여! 이 몸은 색정(色情)을 멀리한 지 오래여서 마음이 쇠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금강철 처럼 되었다오. 그대가 나를 잉걸불이 이글거리는 풍로 위에 올려놓고 팔 아프게 부채질한다 해도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오.” 하여간 적어도 그날 밤, 선생은 부인에 대한 의리를 의연하게 지킨 것이다.
이 때 선생의 상황을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자. 40세이던 1801년 11월, 두 번째 귀양지인 강진에 도착한 선생은 안정된 거처를 찾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겪었다. 주막집 뒷방, 절집의 구석방, 어린 제자의 집 등을 7년간이나 전전하다가, 그러니까 이 꿈을 꾸게 되는 1808년 봄에야 외가 쪽 친척인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호의(好意)로 거처를 그의 산정(山亭)인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선생은 비교적 나은 귀양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했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는 형편이 좀 나아지면 가끔 잡념이 생기기 마련. 이날 밤 선생의 꿈이 심상치 않지만 하여간 초인적 의지를 발휘하여 절세미녀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다. 이 경우도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해야 하나….
1818년 가을 어느 날의 저녁 어스름, 경기도 광주(廣州) 고을 마재〔馬峴〕 마을. 18년이란 오랜 귀양에서 풀려 난 선생이 아버지를 모시러 강진까지 내려왔던 두 아들 학연(學淵) 학유(學游)를 앞세운 채 동구(洞口)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고생 끝에 머리에 서리가 내린 홍씨 부인, 그녀의 마음은 마냥 기쁘지 않고 착잡하기만 하다. 남편의 귀향이 눈물 나게 반갑지만,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군식구가 따라올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녀는 군식구를 데려오지 말라는 자기의 생각을 두 아들 편에 단단히 밝혀둔 바 있다.
대문 앞에 서서 고샅을 응시하는 그녀, 가까워지는 일행. 그때 그녀의 눈에 낯선 두 사람이 보인다. 가녀린 몸매의 이십대 여인과 그녀의 손을 잡고 걷는 네 댓 살가량의 계집아이가 그들이다. 가까이 왔을 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여인, 계면쩍은 표정으로 자기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는 남편. 부아가 뒤집힌 홍씨는 아무리 표정을 부드럽게하려 해도 잘되지 않는다. 홍씨의 차가운 눈길을 의식한 계집아이는 엄마의 치마 뒤로 몸을 꼰다. 그녀는 다가가서 묻는다. “얘! 넌 이름이 뭐니!” 겁먹은 계집애는 앵두 두 알을 포갠 듯한 입을 겨우 뗀다. “홍임이여라.” 붉은 복숭아〔緋桃〕가 낳은 딸, 홍임(紅妊)이었던 것이다. 선생의 현지처, 당시 말로 시앗 혹은 소실(小室)인 홍임 엄마는 정씨(鄭氏)라고도 하고 표씨(表氏)라고도 하는데 우선 정씨라고 해 두자. 5년 전인 1813년 8월 19일에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다산(茶山)의 꿈
오랜 가지 비틀어져 그루터기 된 줄 알았는데
古枝衰朽欲成槎
푸른 새 가지 뻗더니만 꽃을 다 피웠네
擢出靑梢也放花
어디서 날아왔나 색색 깃 아름다운 새
何處飛來彩翎雀
외로이 호올로 하늘 끝에 남으리라
應留一隻落天涯

마르고 비틀어져 다 죽은 고목이었던 선생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뜻밖에도 절세미녀를 만나 생기를 되찾은 것이다. 이야말로 고목생화(枯木生花)! 참새 같은 잡새가 아니라 공작(孔雀)처럼 화려하고 기품 있는 채령작(彩翎雀), 그러니까 색색 깃의 아름다운 새는 누구일까? 바로 이십대의 어린 소실인 정씨인 것이다.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면 그렇게 불렀을까? 그러나 선생이 귀양 온 지도 어언 12년. 선생은 은밀히 해배(解配) 운동을 하고 있었고 실현될 가능성도 컸다. 3년 전인 1810년에는 홍명주(洪命周)의 반대 상소와 이기경(李基慶)의 대계(臺啓) 때문에 실패한 적이 있지만 그치지 않고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이 시를 쓴 다음 해인 1814년에는 석방이 될 뻔했는데 몹쓸 인간 강준흠(姜浚欽)이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또 좌절되기도 했다. 다시 1813년 현재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귀양살이는 조만간 풀릴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운명은? 아내 홍씨의 불같은 성정으로 보아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안타깝고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그녀는 한 마리 외로운 새처럼 조선반도 땅 끝 부근인 이곳 강진에서 홀로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선생의 예상과는 달리 유배생활은 그로부터도 5년 후인 1818년까지 이어졌고 그 사이에 사랑의 과실(果實)인 예쁜 딸 하나도 얻었다. 1808년 11월 6일 밤, 선생은 꿈에 매화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복사꽃을 만났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13년 8월 19일에 쓴 위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그 춥고 길었던 겨울밤에 외로운 귀양객이 꾸었던 꿈이 현실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김언종 교수
문학박사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소장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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