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이 본 러시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각기 고유한 얼굴과 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에도 얼굴이 있고 냄새가 있고 개개인도 서로 다른 얼굴이 있고 서로 다른 냄새가 있다.


필자가 모스크바에 살면서 다른 나라를 가게 될 일이 제법 있었는데 각 나라를 방문할 때 느낀 점은 어느 공항이나 내리자마자 확 다가오는 공기에 그 나라의 인상이 정해진다는 것을 알았고 각 나라마다 공기가 다 달랐다. 어떻게 그리 공항에 흐르는 기류가 다른지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래서 공항에서 느끼지는 분위기가 곧 그 나라의 사회 분위기와 닮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러시아는 자유롭고 활발하고 발랄한 기운이 넘친다. 시장이나 백화점은 물론 키오스크(구멍가게)에도 물건이 많고 사람들도 많이 몰려든다. 사치품도 넘쳐나고 세계 각 나라의 유명 제품들도 많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14-15 세기만 해도 유럽인들은 러시아는 암흑의 나라로 생각하였고 러시아를 여행한다는 것은 죽음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6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인들이 러시아를 찾았는데 그들의 입에서는 황당무계한 나라로 긴 겨울의 추위에 혼을 뺏겼고 풍요롭게 잘사는 봉건적 영지와 그 안에서 수천명의 가난한 농노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며 손님들에게 소금과 빵을 베풀며 우정을 과시하지만 내심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다고 썼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세기 두 영국인이 쓴 여행기가 다른 여행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쓴 글 중 가장 놀랐던 것은 러시아 주요 도시에 겨울장이 서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러시아 어느 지방이나 동네에 시장이나 장이 서면 물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당시에도 여전히 그랬다는 이야기다. 썰매가 줄지어 있고 냉동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옥외 냉장고가 장에 서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피라미드처럼 쌓인 소, 돼지 염소 닭 버터 계란 생선들을 보면서 기절할 뻔 했으며 외국인들은 언 식품을 맛이 상하지 않으면서 잘 녹일 수 있다는 것을 러시아에서 배웠다고 한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절정을 이루는데 이때는 귀족과 농노가 서로 얼굴을 보기도 하며 농부들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식구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이 반갑게 껴안고 좋아하는 광경은 아주 감동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폭설의 기후에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의 재회는 더욱 더 감동적일 것은 필자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 겨울, 그 혹한에 식구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한 광경인지, 화롯가에서 김이 나는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요란한 술자리에서 술을 마구 들이켜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왁자지껄하게 법석을 떨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눈이 오면 씨름질 하며 쌓인 눈 속에서 곰처럼 마구 뒹군다고 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거칠고 난폭한 성질도 지적하고 있으며 신앙심이 깊어 기도를 하기 위해 쿠션 달린 좌석과 비단 방석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의 신앙심은 전 국민이 다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를 잘 간파한 것이다.


옛날의 러시아를 본 영국인이 현대의 러시아를 보면 귀족과 농노가 자본주의자와 회사원으로 바뀌었을 뿐 거의 비슷하게 볼 것 같다. 거의 대동소이하게 러시아인들을 잘 꼬집어 본 영국인의 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국민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지금의 러시아는 농도제도가 사라지고 그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잘 살기 때문에 가진 자들은 체면이나 위신을 지키기 위해 포장을 잘 하거나 여유 있는 삶으로 마음이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난폭하고 술에 찌들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옛날 영국 여행가들이 말한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