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판원, 카센터 등 15개 직업 전전하다 45세 가수된 장사익

공연할 때마다 객석을 울음바다로 빠뜨리는 소리꾼 장사익. 그는 "내 이야기엔 내가 걸어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며 "사계절 자연의 호흡을 거역하지 않는 진정성을 사람들이 읽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소리꾼 장사익(67)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설을 앞두고 ‘원로에게 인생을 묻다’는 주제로 인터뷰한 지난달 17일, 그날도 그는 4가지 습관성 일상어를 입에 달고 다녔다.


곶감과 귤이 좀 눅눅해졌다 싶으면 바로 “아유 쪽팔려”, 끓인 차를 마실 땐 상대방에게 어김없이 “건배”를 외쳤다. 아내가 인터뷰 중 불쑥 방에서 나오면 “아유, 짜증나. 빨리 들어가유”라고 했고,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 하자 “짜장면 먹고 가유”라며 붙잡았다.

6, 7년 전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말투와 표현으로 웃음꽃이 오갔는데, 다시 들으니 반갑고도 시원했다. ‘살아있는’ 장사익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에게 ‘쪽팔려’와 ‘짜증나’는 감정 변화에서 ‘악’을, ‘건배’와 ‘짜장면’은 ‘선’을 상징한다. 희로애락의 감정 구분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는 “우리는 인간이기 앞서 자연이니께”라고 묘한 답을 내놓았다.

장사익은 지난달 1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2016 머니투데이 신년음악회’ 무대에 올라 가슴 먹먹한 한(恨)의 음악을 들려줬다. 그의 무대는 ‘청중 울리기’로 너무 유명해서 이 악물고 버티고 있는 객석 풍경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하지만 그는 객석의 인내의 벽을 ‘기술’이 아닌 ‘진심’으로 이내 허물었다.


‘찔레꽃’에선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스토리텔링의 힘으로, ‘봄날은 간다’에선 첫마디부터 끝 마디까지 미어터지는 바이브레이션으로, ‘봄비’는 마른 음색으로 덤덤히 던지는 가벼운 창법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이날 인터뷰에서 노래마다 각양각색의 창법이 혼재됐다는 얘기를 던지자, 장사익은 “아이고, 기자님이 너무 예민하구먼”하고 털털 웃었다.

“세상에 똑같은 건 너무 재미 없잖아유. 곡조가 때론 여렸다가 세고, 낮았다가 높고 그래야 사람들을 당기죠. 봄에 꽃이 피면 날씨가 좋고 여름이 오면 비가 오고, 가을은 또 다른 세상이 있고, 겨울은 춥고. 그게 하나의 호흡이고 자연 아닌가유? 노래라는 게 괴성만 지르면 익사이팅한 게 거기서 끝나버려유. 아껴놨다가 터뜨릴 때 확 내질러야쥬. 어떤 때 TV에서 제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는 형상이 나와버리는데, 그게 노래고 인생이여유. 가끔 까불기도 하고, 가끔은 진지하기도 하고 뭐 그래야지.”

장사익은 차를 따른 뒤 늘 '건배'를 외친다. 희노애락에서 '락'쯤에 해당하는 의식이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노래와 인생은 자연법칙과 같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 사람. 흥얼거리는 자신의 노래 속에 희로애락이 있고 이 감정은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의 자연법칙과 꼭 맞아 떨어진다고 도돌이표처럼 강조하는 소리꾼 장사익.

그는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빌빌거리며 가는 흐름이 모두 자연의 호흡”이라며 “그 호흡대로 가지 않고 망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봤느냐”고 되물었다. 자연에 대한 그의 예찬 또는 불가역성의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봄에 뿌린 씨앗들이 치열한 여름을 견뎌야 꽃자리 열매가 크죠. 비바람 맞고 햇볕 쬐며 살아남은 놈만 가을에 과실로 나오는 거 아니겠소. 우리 인생도 이런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지유. 그러니 인간의 가장 큰 영광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데 있는 거유.”

서울 종로구 홍지동 북한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사는 그의 집은 절경이다. 통유리창으로 비치는 마당 귀퉁이에 들어선 직벽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서 있다. 그 바위 아래 잣나무와 소나무, 바람과 벌레 소리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사계절을 그대로 재연한다. 그의 인생론이 사계절과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건 이 때문이다.

장사익은 45세에 가수가 됐다. 그전까지 그는 15개 직업을 전전했다. 딸기 장수, 보험회사 직원, 외판원, 경리과장, 카센터 직원 등 해볼 수 있는 직업은 모두 거쳤다. 카센터 일을 마지막으로 그는 ‘음악’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그 시작이 태평소라는 악기였다.

“이거라도 불면 먹고살 것 같아 3년을 매달려 배웠시유. 그리고 사물놀이패에서 태평소를 불며 연명했지. 1994년 어느 날 사물놀이패 공연 뒤풀이에서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 그의 반주에 ‘대전 블루스’를 한번 불렀는데, 이게 내 인생의 꺼진 불을 지필 줄이야. 임동창의 권유로 그해 11월 100석짜리 공연장에서 정식 공연을 했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시유.”

그때부터 장사익은 22년째 노래로 밥벌이하고 있다. 바위 옆에 예쁜 집을 두고 나름 여유 있는 생활이 펼쳐지면서 그의 고민도 깊어지는 듯했다. ‘음반 나온 지 꽤 되지 않았나요?’라고 묻자, 그는 “쉽게 안 나와. 이제 배가 부르고 편하니까 곡이 안 나온다”며 “배고 고파야 하는데, 잠만 자려고 한다”고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겪은 지난 인생의 굴절은 아직도 그의 삶과 음악에 기둥처럼 존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장사익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제 인생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목표였어요. 개똥 같은 생각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제 철학은 변함이 없시유. ‘1=100’, 즉 하나를 하지 않으면 100을 이룰 수 없다는 얘기유.”

어찌 됐든 첫발을 내딛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결과가 성공적이냐는 그다음 문제다. 그렇게 그는 15개의 직업을 통해 첫발을 모두 뗀 행보를 거듭했다.

지난 11일 '2016 머니투데이 신년음악회' 무대에 오른 소리꾼 장사익은 한서린 창법으로 관객과 '소통'했다. 그는 "비애는 비애로 풀어야 제대로 된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고 했다. /사진=홍봉진기자 honggga@

“꿈이 이뤄지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 꿈이 없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제 인생 뒤돌아보면 촌놈으로 시작해 웅변한다고 목소리 틔우고 직장 생활에서 깨지면서 배운거잖유. 그게 다 지금 제가 노래하기 위해 준 고통 아니겠소. 겨울이 그냥 겨울이 아니여. 나무들이 수만 개 봄꽃이 될 나뭇가지에 수액의 기운을 주려고 겨우내 엄청난 에너지를 모을 작전을 짜는 거 아니냔 말이요. 그러니 저도 세월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벽돌을 차곡차곡 쌓듯, 그런 과정을 겪은 것이지유.”

그는 태평소보다 노래를 먼저 했다면 지금쯤 나이트클럽을 전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노래에 욕심내지 않아 이 길을 더 오래 걷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고통을 쌓아 새 길에 적응하는 사람은 오래가고, 고통의 거리를 축약한 타고난 재주는 단명하는 스타가 될 뿐이라는 것도 그가 터득한 인생의 지론이다. 장사익은 “유추하는 과정이 없이 답만 아는 ‘봄여름가울겨울’이 없는 사람은 쉽게 지치고 좌절한다”며 “45세 늦깎이 소리꾼의 장점은 곰삭은 소리에서 나오는 진정성 아니겠느냐”고 했다.

장사익의 못된(?) 재주 중 하나는 그 곰삭은 소리로 관객을 쉽게 울린다는 것이다. 그에게 ‘관객 울리기’를 은근히 즐기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허허. 요즘 부모가 돌아가도 사람들이 잘 안 울어요. 그런데 하찮은 유행가 하나로 눈물을 흘려? 그건 결국 나한테 진정성이 있다는 얘기 아니것소? 관객 100명 중 90%는 힘들고 짜증 나고 그래요. 어머니 얘기 담은 ‘꽃구경’(6집 수록곡)이나 아버지 기억을 담은 ‘아버지’(4집 수록곡) 얘기가 결국 자기네(관객들) 얘기라고 받아들이거든. 그게 소통이쥬. 뜬금없이 흘러가는 노래가 아니라 톡톡 가슴에 비수같이 꽂히니까. 슬플 땐 같이 울어서 씻어내야 하거든요.”

장사익 노래 상당수가 ‘죽음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비애는 비애로 씻을 수 있다는 역설의 치료 효과 때문이다. ‘허허바다’, ‘무덤’, ‘하늘 가는 길’, ‘황혼길’ 등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노래 절반가량이 죽음의 이야기를 다뤘다. ‘세월호’ 참사가 터져 모든 공연이 중단됐을 때에도 장사익은 참사 한 달 뒤인 5월 16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살아도 산 것이 없고/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하는 ‘허허바다’를 노래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았지만, 같이 할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솔직히 굿쟁이다. 이렇게 슬프고 힘든 자리에 우리가 위로하고 풀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소위 ‘씻김굿’을 한 셈이었죠. 힘든 상황일수록 어둡고 무거운 노래가 카타르시스 작용이 오래가는 편이에유.”

늦깎이 가수가 된 장사익의 생활 신조는 '1=100'이다. 하나를 우선 시작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100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작은 도약 하나의 경험이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장사익은 올해 2년 만에 새 음반도 내고 2년에 한 번 하는 세종문화회관 정기공연도 펼친다. 그가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하러 나설 때,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택시를 타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니, “비싸서”라고 답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는데, 배부르고 등 따시면 초심이 사라지잖유. 가방 하나 들고 버스 타고 전철 타면 얼마나 자연스럽고 인간적인데. 거기만큼 사람 냄새 온전히 맡을 수 있는데도 없잖여.”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20년 전반기 끝났으니께 앞으로 20년 후반기를 대비해야지. 인생은 후반기에 더 잘 나가야 하거든. 사람들이 벌써 내 주름살이 예쁘다고 난리여. 하하하.”

더 깊이 주름이 파이고, 약해진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르는 노래. 장사익은 “그게 진짜 노래”라고 했다. 지금보다 더 진짜 같은 그 노래가 꼭 듣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