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우주물리학이 시적 상상력을 만났을 때

김길나 시인(1940년~ )의 다섯 번째 시집 ‘시간의 천국’은 인간에 의해 황폐화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희망의 별’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파피용’을 연상시킨다. 시인은 태양에너지로 움직이는 거대한 우주 범선 ‘파피용’에 탑승해 우주를 여행하면서 이를 세세히 기록하는 ‘시간여행자’ 같다.

밀물과 썰물로 오가며 나를 젖게 한 당신은 루나/ 당신에게 투신하기 위해 지구를 떠난 내 이름은 큐브셋 - ‘달에게 투신’ 일부


아니다. 시인은 벌써 지구를 떠나 루나(달)로 향하는 ‘큐브셋’이 된 듯하다. 큐브셋은 다시 지구로 귀환할 수 없도록 설계된 무인 초소형 우주 탐사선이다. “아무 문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달은 순수 처녀지로/ 펼쳐져”(이하 ‘달에게 투신’) 있고, 시인은 이를 세밀히 기록한다. 지구에서 바라보던 달은 서정과 낭만의 대상이지만 실제의 달은 “혹독한 상처를 결빙시킨 얼음 가슴”을 드러낸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루나인 당신과 큐브셋인 나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시인의 관심은 온통 우주로 향한다. 시인은 우주물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상상력을 더해 광활한 우주를 탐색한다. 칠순이 넘은 생물학적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시적 상상력은 깊고도 넓고, 그 언어는 “동골 동골 공들의 다공체 옷을 입은 스피릿”(‘화성이라는 이름을 지닌’)처럼 통통 튄다.
표제시 ‘0시 -우주’를 살펴보자. ‘그’와 ‘나’의 문답식으로 구성된 이 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외에 다른 우주도 존재한다는 ‘다중우주(多重宇宙) 이론’을 차용했다. 러시아계 미국인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는 우리 우주가 다중우주에 생긴 여러 개 비눗방울의 ‘거품(bubble)’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를 감안하면 이 시에서 말한 ‘물방울’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시의 전체 맥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제목 ‘0시’는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순간과 영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0시’에 우주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0시는 우주 빅뱅의 첫 시간이며, 빅 프리즈의 마지막 시간인 것이다.

우주물리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를 잘 몰라도 시를 감상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것은 시인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사람과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총은 이미 벌레들로 장전되어 있다
별이 죽는 시간을 밤이라 호칭하는 이곳에서
폭발하는 것들의 불꽃이 밤을 꽃피게 하고
현장인 구멍, 거기 격렬하게 빨려들어
숨 가쁘게 발사되는 총알들,
리비도의 소용돌이인 야성의 통로에서 이미
벌레들의 웜홀 여행은 시작되었다
죽음을 통과하는 열정의 속도만큼
경주는 치열하고 통로는 칠흑의 카오스다
생명에 닿기 전 모든 가능성과 파괴가 혼재하는
순간은, 아슬아슬하다 벌레들의 자살이 창궐한다
생성과 소멸이 격돌하는 순간에 퍽퍽 쓰러지는 벌레들 곁에
이 세상에서 반쪽짜리로 죽어간 것들의 쉼표들이 나뒹군다
마침표는 생사를 가른 가혹한 질주 끝에 완성되었다
이제야 보인다 통로 끝머리에 둥글게 차오른
저것! 사랑의 알이다 갈망이 만월로 부푼
에로스 신전이다!
고독한 닿소리를 꼬리에 매단 벌레 한 마리
마침내 닿는다 목마른 모음으로 출렁이는 신천지에

순간, 생명 프로그램이 자동 시행되었다
별에서 벌레로, 벌레에서 호모사피엔스까지
길고 먼 유전의 여정을 담고 한 줄의 문장으로 읽힐
나는 웜홀 밖으로 나왔다
지구라는 또 하나의 자궁 속으로
자전하는 지구의 블랙홀로

- ‘웜홀 여행-기이한 순간들’ 전문

‘웜홀 여행’ 연작인 이 시는 블랙홀과 화이트홀(블랙홀)을 연결한다는 웜홀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섹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총은 남근을, 벌레들은 정충들을, “폭발하는 것들의 불꽃이 밤을 꽃피게” 한다는 건 불같은 사랑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정을 통해 자궁으로 들어간 정자들은 “죽음을 통과하는 열정의 속도만큼” 치열한 경주를 시작한다. “생사를 가른 가혹한 질주 끝에” “사랑의 알”(난자)에 먼저 도착한 단 하나의 정자만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 정자가 난자를 만나는 순간 “생명 프로그램이 자동 시행”되고, 다시 ‘웜홀’(질)을 통해 “지구라는 또 하나의 자궁”, 혹은 “지구의 블랙홀”에서 태어난다.

우주의 탄생과 종말이,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겪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걸 시인은 여러 시편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람이 소우주라는 동양적 사고에서 연유한다. 오늘밤도 시인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시의 나래를 활짝 펼칠 것이다.

◇ 시간의 천국=김길나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44쪽/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