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취중진담처럼 거침없는 연애사가 아슬아슬

술에 취해 옛 애인들에게
까맣게 기억 끓긴 전화질을 해대고 나서
이튿날 쪼그려 앉아 회개하는 나에게
숙취의 혼잣말이 어깨를 두드리나니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기억나지 않는 섹스를 하고
기억나지 않는 여관에서
혼자 깨어난 아침보다 낫다

- '좋은 아침' 전문

‘젊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류근 시인(1966년~ )의 두 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그의 시는 젊은 만큼 자유분방하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고, 심각한 듯 심각하지 않다. 사랑과 이별이 난분분하고, 술 냄새가 진동한다.

진작, 가정을 꾸렸으면서도 애인들과의 연애사가 취중진담처럼 흘러나오고, 심지어 남녀상열지사까지 심심찮게 등장한다. 경험에서 우러난 것 같은 시적 전개에 호기심이 불끈 솟기도 하고, 남성 중심적 사고에 은근 부아가 치밀다가도 이별에 눈물 흘리는 비련의 주인공 같은 그를 꼭 안아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그의 시가 거침없는 건 사회나 제도, 혹은 연줄 같은 정해진 틀과 경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것 같다. 하지만 자유롭고 싶은 욕망과 달리 현실은 그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여 그의 시는 생기발랄 젊음을 발산하기보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낭만주의자처럼 내적 감정을 소진한다.

먼저 표제시 ‘좋은 아침’을 보자. “술에 취해 옛 애인들에게” “전화질을 해대고”는 이튿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히 후회가 뒤따른다. 아니 자책(회개)한다.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기억나지 않는 섹스를 하고/ 기억나지 않는 여관에서/ 혼자 깨어난 아침보다 낫다”고 자위한다.

재미있는 건 ‘옛 애인’이 진짜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일 수도 있겠지만 시 ‘옛날 애인’에서 보듯, ‘아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상해보라. 늦은 밤, 집에 들어올 생각은 않고 헤어진 애인에게 하듯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횡설수설하는 장면을, 아침에 일어났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그게 류근이다.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의 사람이 되어서 결국 옛날 애인이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아내여,

- ‘옛날 애인’ 부분

등단 18년 만에 낸 첫 시집 ‘상처적 체질’에 수록된 시 ‘가족의 힘’에서 그는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등을 두들겨주며 위로해준다. 하지만 6년 만에 낸 이번 시집에서 아내는 ‘집 밖의 애인’을 눈치채고 이혼을 요구(‘콩가루 생각’)하거나 잠을 자다가 신경질적으로 깨어 수면제를 찾기도 한다. 술과 여자(애인)들을 가까이 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가족과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아내 몰래 7년을 끌어온 연애가 끝이 났을 때
아들은 문득 백 점을 맞은 받아쓰기 답안지를 꺼내 보이고
나는 민방위 소집 훈련에서마저 풀려나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새 내겐 아들 하나가 더 생겼고
직장은 바뀌었으며 은행 빚은 더 늘었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내는 그동안 내 연애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내가 새삼 각성해야 할 만큼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지혜로운 무관심이거나 참을성 또는
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따돌리거나 외출하거나
어떤 거짓말로든 늦게 귀가를 하고
때로는 외박을 하기 위해 지어낸 노력만큼
아내에게도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자존심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무엇인가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옛날 폭력을 일삼던 수학 선생의 주먹을 참아내던 일
더 부당한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고 군대를 마쳤던 일
시궁창까지 야비하고 비겁했던 상사와 거래처 인사들을
결국 죽여버리지 않고 퇴근해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던 일처럼
아내 역시 한꺼번에 뒤엎어버리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경계가
무엇인가의 아슬아슬한 내부가 늘 있지 않았을까

7년의 연애가 끝나고 나는 결국 몹시 헐거워졌으나
아이들은 자라고 아내는 그토록 잘 속아주었으나
이제 어떤 것도 더는 속여먹을 수 없는 생애가
내 앞에 고지서처럼 툭 떨어져 나부끼고 있을 때
나 역시 아내의 내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내부의 그 무엇이 되어 있다는 것이 어리둥절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아슬아슬한 내부’ 전문

그가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외로워서’라고 한다. 그의 외로움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사람이 그리운, 그런 것이다. 어쩌면 정(情)의 부재가 틀을 싫어하는 시인을 많은 사람들 속에 있게 하고, 또 그 속에서 더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가장이 자꾸 집 밖으로 나돌면 가족, 특히 아내와의 갈등은 필연의 과정이다. “민방위 소집 훈련에서마저 풀려나/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나이”(이하 ‘아슬아슬한 내부’)가 된 지금 “내 연애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내는 “내가 새삼 각성해야 할 만큼 문제를 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아내의 반응이 “지혜로운 무관심이거나 참을성”,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존심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무엇”, 즉 ‘가족’ 때문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가장인 그가 사회적 폭력과 모욕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을 부양한 만큼 “아내 역시 한꺼번에 뒤엎어버리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경계”를 지키고자 애쓰고 있다. 아이들은 자라 엄마편이 되었고, 그는 아내의 ‘내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어쩌다 ‘가족의 섬’이 된 시인은 한동안 아내의 눈치를 보며 ‘인문학적 고뇌’를 할 것 같다. 이에 세 번째 시집은 좀 더 가족에게 기울어지는, 길들여진 야생마 같은 시편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우일까?

◇ 어떻게든 이별=류근 지음. 문학과지성사. 160쪽/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