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속보
VIP
통합검색

[시인의 집]누가 그래, 사랑이 속절없다고?

머니투데이
  • 김정수 시인
  • 카카오톡 공유하기
  • 카카오톡 나에게 전송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 문자
  • VIEW 5,128
  • 2016.10.15 03:10
  • 글자크기조절
  • 의견 남기기

<70> 하재일 시인 ‘동네 한 바퀴’

[시인의 집]누가 그래, 사랑이 속절없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여름내 열매는 방 하나씩 들이고 산다

고백할까 말까 망설이며 설익어간다

풀밭에 떨어져 쉽게 뒹구는 것들 때문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인 줄 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이렇게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게 된 것일까

익기 전에 떨어져 멍이 든 불량한 과일들,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은 대체 뭐람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 '불량 과일' 전문

하늘색 표지에 한 편의 시가 오롯이 들어가 있는 하재일 시인(1961년~ )의 다섯 번째 시집 ‘동네 한 바퀴’는 뭉근한 사랑을 어떤 대상에 기대 보여주고 있다. 여는 시 ‘불량 과일’부터 닫는 시 ‘주름’까지 동네 한 바퀴를 돌 듯 천천히 읽다보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풋과일 같은 사랑의 감정이 충만해진다.

표제시 ‘불량 과일’은 꽃 진 자리에 들어서는 과일이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자리 잡은 사랑은 신방처럼 “방 하나씩 들”인다. “고백할까 말까 망설이며 설익어”가는 풋사랑의 시기를 거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으로 발전해간다. 사랑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온통 사랑하는 대상만이 눈에 들어오고, 그게 삶의 전부인 줄 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온 후 사랑에도 신맛과 단맛이 있다는 걸 겨우 알아챈다. 벌레 먹은 과일이 가장 달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벌레 먹은 과일은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 즉 이별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사랑이 쉽게 끝나겠는가. 오히려 상처를 겪은 사랑이 더 영원하다고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가 독백하듯 말한다.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랑의 절창이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생각이 어둠으로 잠겨 있는 것

성당 진입로 담장 아래 자전거가 자물통이 채워진 채
은행나무에 꼼짝없이 강아지로 묶여 있듯이

자전거의 주인은 품이 크고 속이 깊은 나무를 믿고
쇠줄을 채워 놓은 채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길가에 버려져 바람의 결에 노숙하는데
위치를 벗어나 야반도주라도 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간혹 지나가는 행인이 술에 취해 발길질을 해도
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어야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다

내가 배회하던 밤, 달빛으로 서로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불편한 거리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무와 자전거의 결합이 상처뿐인 생이 아니라
둘의 맹세인 옹이로 변해 잎은 푸르러지는 것이다

- ‘자전거는 푸르다’ 전문


‘자전거’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다루고 있는 이 시는 “사랑이란 서로 다른 생각이 어둠으로 잠겨 있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아포리즘으로 시작된다. 사랑을 ‘같음’, ‘밝음’, ‘열림’이 아니라 ‘다른’, ‘어둠’, ‘잠김’과 같이 부정적으로 정의한 이유는 “성당 진입로 담장 아래” 은행나무에 “자물통이 채워진 채” 묶여 있는 자전거 때문이다. 은행나무와 자전거라는 이질적인 것들이 한 몸으로 묶여 있는 것을 서로 사랑한다고 연상한 것. “자기들끼리 길가에 버려져 바람의 결에 노숙하는” 열악한 조건의 사랑이지만 이들은 “위치를 벗어나 야반도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간혹 지나가는 행인이 술에 취해 발길질을 해도/ 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불편한 거리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나무와 자전거의 결합이 상처뿐인 생이 아니라/ 둘의 맹세인 옹이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는 “푸르러지는 것”임을 안다. ‘사랑과 맹세’가 ‘불편과 상처’를 뛰어넘어 사랑의 결실인 ‘옹이’가 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무와 자전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대못 하나쯤 박고 살게 마련이다

그걸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녹이 슨 못 위에
자신의 화려한 외투 한 벌을 걸어둔다

- ‘외투’ 전문


1984년 월간 ‘불교사상’에서 공모한 만해시인상에 당선돼 등단한 하재일 시인은 서해 바닷가 출신이다. 많은 시들이 바다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사랑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사랑만으로 살 순 없는 법. 인생은 늘 굴곡이 있게 마련이고, 가슴에 커다란 상처 하나쯤은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 상처를 쉽게 보여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가장 화려한 날로 포장해 마치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삶의 일부분인 사랑이라고 무에 다르겠는가. 시인의 삶이라고 또 다르겠는가. 다들 그리 “가슴에 대못 하나쯤 박고 살”아가고, 그걸 숨기기 위해 “녹이 슨 못 위에/ 자신의 화려한 외투 한 벌을 걸어”두지 않는가.

◇ 동네 한 바퀴=하재일 솔출판사. 156쪽/ 8000원

[시인의 집]누가 그래, 사랑이 속절없다고?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6년 10월 14일 (08:5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베스트클릭

오늘의 꿀팁

  • 날씨
  • 건강쏙쏙

많이 본 뉴스

부동산 유튜브 정보채널 부릿지
부꾸미
머니투데이 수소대상
사회안전지수

포토 / 영상

머니투데이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