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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는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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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6.10.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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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48-홍경래 : 19세기 농민항쟁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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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반란은 대개 어설프게 실패로 끝난다. 당연한 일이다. 성공한 반란은 반란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그것을 빛나는 창업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렇다면 반란으로 남은 반란은 단지 패자의 볼품없는 유산일 뿐일까?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여주인공 라온의 아버지로 등장한 홍경래도 바로 그 실패한 반란의 지도자였다. 1811년 12월 18일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는 1000여 명의 무장병력이 집결하고 봉기의 횃불이 타올랐다. 단상에 오른 홍경래는 격문을 공표했다.

"조정에서는 썩은 땅과 다름없이 평안도를 버렸고, 권세가에서는 종들조차 우리를 보면 평안도 놈이라 일컬었다."

홍경래의 일침은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지역차별은 그가 반란을 꿈꾼 계기였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태생으로 일찍이 과거시험에 뜻을 두고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서북지방 출신에게 과거의 문턱은 높았다. '택리지'에서는 평안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평안도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혹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있다고 해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 양반은 서북인과 혼인하거나 벗하기를 꺼린다."

평안도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유교문화의 변방으로 멸시를 받았다. 19세기 들어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며 푸대접은 극심해졌다. 과거에 급제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는 관원들은 대부분 한양의 세도가문 출신이었다. 홍경래 같은 평안도 사람에게 돌아갈 자리는 없었다.

과거시험에 낙방한 홍경래는 지역차별과 세도정치에 분노했다. 그는 풍수를 호구지책 삼아 각지를 유랑하며 민심을 살피고 반란의 포부를 키웠다.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김사용 등 조력자들도 만났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반란의 또 다른 성격이 드러난다.

당시 평안도는 중국 무역과 광산 채굴 등이 성행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고 부가 쌓였다. 홍경래의 조력자들 가운데는 지역 태생의 향반, 향리,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 토착세력은 무역과 광산에 관여하며 힘을 키우려 했다. 하지만 서북지방의 상공업과 부는 한양 세도가문의 대리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토착세력은 불만이 컸고 결국 홍경래와 손잡았다.

홍경래의 난은 애초 지역차별 철폐와 세도정치 타파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이면에는 향반, 향리, 상인 등 토착세력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었다. 홍경래는 반란 초기에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천 등지를 손쉽게 점령했다. 이 또한 지역 유력자들의 내응 덕분이었다.

그러나 관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홍경래군은 참패를 거듭했다. 1812년 1월 17일 홍경래 등 지도부가 정주성에서 농성에 들어가자 주판알을 굴리던 토착세력은 관군 편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민병을 동원해 반군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때 홍경래에게 원군이 나타났다.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관군은 홍경래군을 격파하면서 인근의 마을들을 습격했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반군의 씨를 말리는 초토화 전술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농민들이 의탁할 곳은 정주성 뿐이었다.

홍경래는 살 길을 찾아온 농민들을 받아들였다. 그가 10년간 준비한 거사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새로이 농민항쟁이 불붙은 것이다. 농민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관군에 맞서 3개월이나 버텼다. 솥을 부숴 탄환을 만들고 누룩가루로 연명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4월 19일 북장대에서 굉음이 울리며 성벽이 무너졌다. 관군이 땅굴을 파서 매설한 폭약이 터진 것이다. 군사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고 항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홍경래는 사살 당했으며 1917명의 장정이 처형되었다.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 전부 죽인 것이다.

홍경래의 최후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정주성에서 목숨을 잃은 건 가짜고, 진짜는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는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삼남농민항쟁(1862), 동학농민항쟁(1894)으로 부활했다. 승자의 치적은 기록에 남지만, 패자의 분루는 가슴으로 전해진다.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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