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여든넷에 첫 시집… 삶의 무게 그대로 ‘살아 있는 말씀’

‘빨래’

동지섣달 폭풍 냇가에
고등얼음에 콩깍지 잿물 받아서 빨래하면
손발이 터져 나갈 듯 했네.
물을 팔팔 끓여
요강에 담아 가 손을 적셔가며 빨래를 했네.
밤에 손이 터서
피가 나고 따갑고
견디기 힘들게 아플 때
시어머님 하신 말씀.
“야야 오줌을 눠서 거기에 손을 담그라.”
내 오줌을 눠서 아픈 손 담갔네.



맙소사! 여든넷에 첫 시집이라니….
시집 제목이 ‘‘가’자 뒷다리’다. 참나! 개구리 뒷다리도 아니고… 글자에 뒷다리가 있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 그 시인의 이름은 황보출이다. 책도 엄청 크고, 본문 글자도 크다. 어르신들이 돋보기 없이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겠다.

책날개에 수록된 약력에 의하면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문턱도 넘어본 적 없는, 70대 후반에 뒤늦게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인천에서 서울 회기동의 한 어머니학교까지 전철을 타고 다니며 한글공부를 해서는 2012년 2월에 초등학교 인정 졸업장을 취득하셨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를 써서 전국문해교육협의회에서 주최한 한글날 글쓰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KBS ‘낭독의 발견’에 출연해 시를 낭독하기도 하셨단다.

이성수 시인은 표제시 ‘빨래’를 읽던 날 펑펑 울었다고 발문에서 밝혔다. “동지섣달 폭풍 냇가”에서 ‘고등얼음’(이건 또 무슨 뜻인가?)을 깨고 빨래를 하는, 팔팔 끓는 물이 담긴 요강에 언 손을 담가가며 빨래를 하다가 요강의 물이 다시 차가워지면 요강에 오줌을 눠 언 손을 녹이며 빨래를 하는 정경과 아픔이 오롯이 드러났기 때문이란다.


어휴, 오줌에 손을 담가가며 빨래를 하다니! 더럽다, 아니다. 가슴이 아려온다.

내 남편 열여섯 살
처녀는 열여덟 살
둘이 결혼해서 육 개월 살다가
부인이 죽었네.

내 남편
죽은 부인 잊을 수 없다 했네.

내가 애기를 낳자
애기가 예쁘다며
죽은 첫 부인 닮았다고 했네.

그 소리 듣기 싫었네.

나하고 결혼해서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부인 제사를 지냈네.

남편하고 사십 년 살아도
부부 정은
이십 년밖에 안 되네.
그 분 생각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했네.
- ‘내가 미쳤지’ 전문

내가 생각해도 미친 것 같다. 아니다. 숭고하다. “나 죽을 때까지 이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절대 하지 않겠다고 혼자 약속한 비밀”을 시로 줄줄이 풀어냈다. 마치 장롱 깊숙이 넣어둔 일기장을 몰래 꺼내 보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전처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아이를 낳자 죽은 부인을 닮았다고 하는 남편, 사십 년 동안 그 부인의 제사를 지낸 가슴 아픈 사연을 풀어놓고 있지 않은가.

이뿐만이 아니다. ‘보릿고개 육이오’ 시절 부잣집에 가서 일해주고 밥을 얻어와 바다 ‘물나물’을 잔뜩 넣고 죽을 끓여 가족이 먹은 슬픈 사연, 엄마랑 봄나물 캐러 간 날의 추억, 남편이 중한 병으로 입원하자 시어머니가 농약을 마시고 돌아가신 마음 아픈 이야기 등을 시로 승화시켰다.

가슴 깊이 묻어둔 아픈 사연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사실 시쓰기는 내 상처를 드러내, 나를 들여다보고 치유행위 아니겠는가. 그 다음에야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유쾌하고도 상쾌한 시가 나오지 않겠는가.

딸집 냉장고에 있는
피로회복제를
동네 친구에게 마시라고 주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매일 힘들다는 친구.
친구가 마시는 줄 알았는데
피로회복제를 내게 도로 주었다.
뚜껑 못 열고 주는 줄 알았다.
“형님 이거 멸치 액젓입니다.”
친구도 글을 모른다.
나도 안경을 안 써서
글이 보이지 않는다.
둘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 ‘피로회복제’

한 어르신은 글씨를 몰라서, 또 한 어르신은 안경을 쓰지 않아서 피로회복제 대신 멸치액젓을 주고받다가 “배꼽을 잡고 웃는” 광경을 기막히게 표현했다. 모른다는 것과 안 보인다는 것이 조금도 흠결이 되지 않는 ‘나이듦’을, 이웃의 정(情)을 시라는 그릇에 담은 것. 하지만 같이 배꼽을 잡고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픔이 배어난다. 요즘 말로 ‘웃픈’ 광경이다.

“인생은/ 나무 밑에 앉았다가/ 새처럼/ 날아갔다.”(‘나무에 앉은 새’ 전문)는 짧은 시에 이르면 시집을 펼쳤을 때의 치기어린 웃음은 싹 사라진다. 부끄럽고 부럽다. 삶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쉬운 문장 속에서 번득이는 지혜와 삶의 무게 그대로 ‘살아 있는 말씀’이다.

◇ ‘가’자 뒷다리=황보출 지음 돋보기 펴냄. 132쪽/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