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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양반이면 양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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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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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2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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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7 – 양반 : 특권은 누리되 책임은 외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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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실존인물 홍길동은 어째서 연산군 재위기에 등장했을까? 의적과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두 사람이 동시대에 조우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양을 대표하는 의적 로빈 훗도 섭정 존이 폭정을 휘두를 때 모습을 나타냈다. 폭군과 의적은 운명의 짝일까?

사실 이 조합은 그럴 듯하다. 폭군이 백성을 못살게 구니까 저항세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들을 나라에서는 도적이라고 부르지만, 백성은 의적이라고 치켜세운다. 언뜻 수긍이 가는 단순논리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당대의 사회질서를 살펴보면 폭군과 의적의 출현배경은 따로 있었다. 조선에선 양반이 폭정과 저항의 화근이었다.

“산에는 높은 봉우리와 낮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자연이 이러할진대 어찌 인간에게 높고 낮음이 없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구분이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지요.”

사극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연산군과 함께 악의 축을 맡은 양반들의 말이다. 조선시대 양반(兩班)은 유학을 공부하고 나랏일을 본 지배층이었다. 그들은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엄격한 신분질서를 설파했다. 이를 ‘예(禮)’로 포장하고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라고 외쳤다. 문제는 그게 양반들의 특권과 반칙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는 점이다.

이 신분질서의 원조는 공자(孔子)다. 그는 중국이 큰 혼란기로 접어드는 춘추시대를 살았다. 주나라가 유명무실해지고 제후들이 걸핏 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난세였다. 난리 통에 피 보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다. 참상을 목격한 공자는 옛날 요순시절이 잘 다스려졌다며 예로 돌아가서 어진 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로 돌아가라니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논어(論語)’에 맞물리는 대목이 나온다. 공자는 딱 여덟 자로 정리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울 것. 공자는 지배층의 윤리를 중시했다. 신하가 임금을 내쫓고, 자식이 부모를 치는 패륜이 혼란을 부추긴다고 봤다. 백성을 구하려면 먼저 제후부터 사람 만들어야 한다.

공자가 창시한 유학은 그래서 자기수양의 학문이다. 성리학적 지배의 교과서라 할 ‘성학집요(聖學輯要)’에 이율곡이 밝혔듯이 ‘나를 닦아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유자(儒者)의 소명이다. 그러나 공자의 후예이자 유자를 자처한 조선 양반들은 옛 성현의 권위를 내세워 ‘갑질’하기 바빴다. 조선은 그렇게 ‘양반의 나라’로 치달았다.

양반들의 특권은 유교 통치체제에 편승한 것이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를 정비하고 신하들의 언로(言路)를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덕분에 양반의 발언권은 왕권을 위협할 만큼 세졌다. 예컨대 홍문관 관원 유호인이 왕명이 부당하다며 거부하자 임금이 노했는데, 그의 상관 성세명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부하를 두둔했다.

“신하의 도는 의(義)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성종실록 1493년 10월 27일, 성세명의 간언)

연산군이 무오년(1498)과 갑자년(1504)에 사화를 일으킨 데는 유교 통치체제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양반이 임금을 능멸한다고 여겼으며 이를 폭력과 공포로 억누르려 했다. 사화의 단초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나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잡아낸 꼬투리였다. 결국 양반들의 특권이 폭군을 부른 셈이다.

연산군도 문제지만 특권은 특권대로 누리고 백성에게 반칙을 일삼는 양반도 할 말이 없다. 16세기 접어들며 양반들은 조정과 지방수령의 비호를 받으며 경향 각지에서 토지를 넓혀나갔다. 가혹한 세금도 모자라 양반사족의 수탈이 기승을 부리자 토지를 빼앗기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게임의 법칙 자체가 불리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가 아닌가.

“이제 집도 없이 떠돌면서 궁벽한 골짜기에 이르러 원망하고 울부짖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명종실록 1557년 5월 7일, 황준량의 상소)

백성 입장에서는 양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쳤을 것이다. 사또도 양반이고, 대지주도 양반이다. 백성들이 볼 때 임금은 멀고 양반은 가깝다. 양반이 곧 나라님인 것이다. 이 시기에 홍길동과 임꺽정 같은 큰 도적들이 출현한 것은 필연이다. 양반 위주의 신분질서 바깥에서 저항하는 행위만으로도 민심을 대변한다. 그들이 의적이라고 치켜세워진 이유다.

이처럼 폭군과 의적이 칼을 겨눈 공동의 적은 양반들이었다. 조선시대 양반은 권력과 재산, 그리고 위신을 모두 움켜쥐었다. 희소가치 높은 사회자원을 독점하고 ‘갑질’을 했다. 그럼에도 공자가 당부한 지배층의 윤리를 장착했다면 마냥 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양반들에게 공자의 학문은 과거에 급제해 영달을 꾀하는 수단이었을 따름이다.

지배층의 윤리란 무엇인가. 바로 자신들이 누리는 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할 의무다. 신라 귀족들은 전쟁 나면 제 자식을 선봉에 세워 나라를 지키게 했다. 그 희생정신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다. 구한말의 명문거족인 이회영과 형제들은 나라가 망하자 모든 재산을 털어 간도로 건너갔다. 그들이 세우고 헌신한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젖줄이 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양반이면 양반답게!


‘특권은 책임을 수반한다.’ 옥스퍼드사전에 나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의 중 하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야 말로 ‘양반다움’의 진정한 근거다. 물론 군역과 세금까지 백성에게 미루기 일쑤였던 조선시대 양반에게 책임, 희생, 헌신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무리다. 다만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그릇된 유산이, 일제강점기 친일로 이어진 그 병폐가, 이 전환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일깨우는 경종이 돼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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