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곁을 내어준 따스한 슬픔

2015년 ‘시인동네’로 등단한 민왕기(1978~ ) 시인의 첫 시집 ‘아늑’은 여간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중년 사내가 “줄 것이 없어서 오늘은 곁”(이하 ‘곁’)을 내어주고 강물처럼 울고 있는, 따스하면서도 쓸쓸한 시집이다. 안으로 더께를 더한 상처와 슬픔을 어우만지며 또 다른 나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속울음 깊은 시집이다. 상처는 본능적으로 이쪽과 저쪽으로 편을 나누지만, 그러함에도 “자꾸 사람에게 가 온기를 찾아보는 쓸쓸이 있어” 간혹 “내 곁을 쓸어”보는 정(情)과 한(限)의 서정성에 몸을 기대고 있다.

주인 없는 그 집을 도둑처럼 서성거리다 버려진 화투장 같은 것들 뒤집어보았네
팔공산 달밤에 님 만나 술 한 잔, 이라
늦바람처럼 봄날 깊어 세상의 모든 야반도주가 흔적 없겠네
이런 날엔 바람난 그 아지매도 봄바람에 라일락 라일락, 치맛자락 날리기도 했을 거니
세상의 모든 버려진 집이 꽃잎 같겠네
봄 깊어 꽃 떨어지고 홀아비 살다 죽은 그 집, 세상의 헐한 정처가 정처 없이 말라가겠네
- ‘빈 집’ 전문


‘빈 집’은 ‘따스한 쓸쓸’이 짙게 배어있는 시다. 혼자 빈 집을 찾은 화자는 바람난 아지매와 버림받아 홀로 살다가 죽은 홀아비의 “버려진 화투장 같은” 삶을 떠올린다. 아지매는 화투의 패처럼 “팔공산 달밤에 님 만나 술 한 잔”하다가 “봄바람에 라일락 라일락, 치맛자락 날리기도 했을” 터이지만 “세상의 모든 버려진 집이 꽃잎”처럼 다 부질없는 짓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늦바람이 난 아지매도, 버림받은 홀아비도 지금은 흔적 없고, “정처 없이 말라”갔을 뿐이다. 슬픔과 상처의 근원지와도 같은 빈 집을 찾은 화자의 마음은 폐허 그 자체다. “한 생이 너무 슬프고 어지”(‘여름날의 개를 좋아하세요’)러울 만큼의 큰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이는 어떤 계기로 인해 더 깊어진다. “어린 나는 두 눈이 다 흐려지는 희미가 되었”(‘희미’)고, “혼자가 된 한 여자를 위해 곡을 하다, 나도 그만 개울처럼 울어버”(‘곡’)리고, “시인의 옆에 앉아 울”(‘시인의 멱살’)고, “당신이 옆에 있는데, 당신이 멀리 있을까봐 방에서 깨어 울었던 적 있”(‘적’)고, “지금도 그때도 모두 좋았던 시절, 눈물 많아 좋았던 시절”(‘시절’)도 있지만 “어느 날부턴가 한바탕 울고 나면 후련해지는 날 있고, 거기서 배 타고 삼십 분만 나가도 삶은 망망대해”(‘명일카센타’)인 것이다.

상처와 슬픔을 따라가 보면 가족이 있다. “명자라는 이름의 여자”(‘마리여관’)가 있던 암 투병하신 아버지, 사천에 산다는 작은 고모와 “반편이가 된 늙은 아들”(‘사천’), “석양 아래 새끼들 밥 먹이며 사는 일이 평생이었다”는 노모(‘서향집 일기’) 그리고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가난은 그가 시를 쓰게 된 연유이면서 슬픈 사유다. 그의 언어가 간절·간곡·애틋·은밀·아늑·선뜻·희미 등과 같은 감성에 곁을 둔 이유이기도 하다.


입으로 넘어온 찬 돌 하나를 버리고 오는 밤이었다
　
오래 앓던 돌 하나를 게워내 화양강에 던져버리고 돌아가는데
어디서 자꾸 허청거리는 허공이 하나 따라붙은 거였다
사람이 슬픔 하나를 떼어내기 위해선 수많은 밤을 울어야 하는데
겨우 그 찬 걸 하나 내려놓고 나니, 웬일인지 몸이 뒤척이고 돌 놓였던 자리가 휑해지는 거였다
　
돌멩이 하나를 오래 앓다가 아편을 삼키고 죽은 내 사람을 생각하면
돌 하나를 고스란히 견디는 일은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는 설운 일이라
버리고 돌아와 살던 거였는데
　　
어느 밤엔가 어머니가 돌 하나를 토해놓고 울다가
그게 어떤 간곡이었는지,
몰래 뱉어놓은 걸 집어 다시 삼키시는 걸 보고는
슬픔에도 간곡이 있다는 걸, 버려선 안 되는 간곡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픈 것들을 자꾸 내다 버리고
다 버린 줄 알았는데 문득 돌 하나가 입으로 넘어오는 밤
그 간곡에 대해 생각하면
이 돌 하나가 나와 너의 간곡이라면, 이쁜 것들마다 다 슬픈 것들이다
- ‘간곡’ 전문

시 ‘간곡’은 정말 간곡하다. 참다 참다 “오래 앓던 (찬) 돌 하나를 게워내 화양강에 던져버리고 돌아가는데”, “어디서 자꾸 허청거리는 허공이 하나 따라붙”는다. “수많은 밤을 울”고서야 겨우 “슬픔 하나를 떼어”냈는데, “오래 앓다가 아편을 삼키고 죽은 내 사람”을 잊고 견디자 했는데 “어머니가 돌 하나를 토해놓고 울다가” “몰래 뱉어놓은 걸 집어 다시 삼키시는 걸 보고는/ 슬픔에도 간곡이 있다는 걸, 버려선 안 되는 간곡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참 곡진한 간곡이다.

“너무 멀리 와”(‘은밀’) 새 가정을 꾸리며 사는 시인에 가족은 이제 상처를 치유해주는 “고마운 풀씨”(‘풀의 미열’)다. 표제시 ‘아이가 자는 방’에서 보듯, 시인은 새근거리며 잠든 아이를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눈송이처럼 깨끗하게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 아이의 잠자는 모습과 소리는 “쌀을 씻듯 말갛게 나를 씻겨” “그 옛날 거칠 손(아버지)”이 찾아와도 다 받아들일 만큼 넉넉한 품이다. 애를 낳아 기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순한 것들에게서 넘어온 숨”을 통해 “마음이 해야 할 설거지”(‘여자의 방향’)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너로 이어질 뿐”(‘논물 보았음’)인 아버지의 ‘눈물의 이력’이 내 아이로 인해 ‘웃음의 이력’이 되는 순간이다.

◇아늑=민왕기 지음. 달아실 펴냄. 124쪽/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