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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금방 죽을 꽃을 왜 사다 꽂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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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05.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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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박소유 시인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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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소유(1961~ )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일정 거리에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면서 나를 성찰하고 에둘러 불합리한 세상을 질타한다. 쉽게 좁힐 수 없는 그 거리만큼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모든 것이 꽃이라 생각했던”(이후 ‘시인의 말’) 시절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자연 섭리에 순응하면서 “꽃보다 그늘”에 주목한다. 그늘은 꽃과 빛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나 사랑의 부재로 비롯된 슬픔과 상처는 삶을 외롭고 쓸쓸한 골목으로 인도하고, 시를 쓰게 하고, 사유를 더욱 웅숭깊게 한다.

꽃과 꽃 사이가 쓸쓸하다고 당신이 말했을 때 나는 약간 어깨를 으쓱했다 첫사랑과 첫눈, 그 ‘첫’ 때문에 쓸쓸했던 나는 당신과 거리를 두었다 붉은 꽃, 흰 꽃이 어느 쪽으로 든 꺾일 수 있게 만발했다고 함부로 꺾을 수 없듯이, 화살표가 가리키는 세상의 모든 방향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당신과 거리를 두었다 그 거리는 오래되었으니 낯설고 이상한 것이 없어진 당신과 거리를 두었다 더 이상 거리낌이 없게 되었을 때 빛나는 것은 항상 길 건너편에 있었다 햇빛 속에 휘날리다 사라지는 눈발 같은, 몸 둘 바 없다는 말…… 약간 삐끗했을 뿐인데 생에서 멀어지는 순간에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당신과 거리를 두었다 꽃의 직전은 그 어떤 직후보다 쓸쓸할 거라는 걸 미리 안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그 거리를 사랑했으므로 당신은 거기 혼자 서 있어야 한다

- ‘약간의 거리’ 전문


여는 시 ‘약간의 거리’는 시집 전체의 시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다. 사이와 거리는 좁히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나는 한 걸음 물러서는 수동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간해서 좁혀지지 않은 거리는 ‘당신이 나를’이 아닌 내가 “당신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가오면 다가온 만큼 내가 뒤로 물러난 것. 그런 관계는 최근의 일이 아닌 오래된 것으로 “낯설고 이상한 것”조차 없어졌다.

쓸쓸한 “꽃과 꽃 사이”는 당신이 현재 느끼는 감정이면서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지만 나의 쓸쓸함은 “첫사랑과 첫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개한 어느 꽃이든 “함부로 꺾을 수” 있다는 당신의 태도와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약간 삐끗”하는 바람에 내가 원하는 “생에서 멀어”지고 만다. 내가 진정 원하는 “빛나는 것은 항상 길 건너편에 있었”지만 그때는 생각이 모자랐다. 지금 후회해봐야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사랑한 “그 거리”는 나와 당신, 나와 당신의 생각,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과거와 현재의 나 삶 등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긋난 만남으로 인한 쓸쓸함으로 당신과 “그 거리”를 유지하지만, 단절이나 절대가 아닌 ‘약간’이라는 제한조건을 두고 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열 몇 살 때”(이하 ‘미끄러지는 시간’) 가출해 “세상이 어떤가”를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종일 헤매다 돌아가 보니/ 늦은 밤 불 켜놓고 기다”린 식구들과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의 부끄러움과 식구들의 걱정을 몸소 체험하고는 “한번 나가 봤으니 이제 되었다”는 순응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 “너무 가까워 너무 멀어진”(‘부부’) 부부 사이나 “최대한 내게서 멀어질 수 있도록”(‘달 가까이 -아들에게’) 아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주 잠깐,
세상의 애비들이 길바닥에 뿌리고 간
빗방울 몇 점
여기저기 나타나는 혼외자식같이 꽃이 핀다
꽃 피기 전에는 몰랐는데
혈연이라는 것
참 붉다

가로수 밑둥치까지 바짝 잘라냈는데
그 밑에서 초록 잎 마구 터져 나오고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서 애를 낳고 마는 저 아찔한!
뭐, 어쩌라고
봄의 사고다발은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우리한테 와 안기는데

한 박자만 늦추자
스텝이 꼬여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부풀어 올랐다가 금방 꺼지고 마는 봄은
세상천지가 다 입덧을 해도
도대체 뭘 낳았는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꽃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 ‘행진곡’ 전문


“아직도 그곳에 복사꽃 만발한가”(‘구름의 시차’), “죽은 꽃을 한 아름 안고 온 꽃바구니를 버리면 추억마저 사라지고”(‘미니멀리즘’), “금방 죽을 꽃을 왜 사다 꽂는지”(‘골목을 사랑하는 방식’), “꽃은 잠깐이고”(‘가버린 봄밤에 대해’), “개나리 꽃잎이/ 더 노랗게 피었다는 거지”(‘개나리꽃’), “빈집에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파초’), “나팔꽃은 나팔을 챙겨 벌써 사라진 뒤다”(‘넝쿨의 비유’), “붉은 것만이 생의 전부였던 꽃은 약속도 없이 어디로 갔을까”(‘약속’)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꽃은 시인 자신을 상징하면서 그리움의 대상이다. 꽃은 만개한 이후 한 잎 두 잎 바닥에 떨어진다. 시인의 마음도 덩달아 떨어진다. 낙화의 거리만큼 상처도, 그리움도 깊어진다.

어느새 시인의 시선은 거리(사이)에서 그늘로 옮겨진다. 아주 조금 봄비가 내린 뒤 피어나는 꽃과 밑둥치까지 잘린 가로수에서 돋아나는 초록 잎을 통해 “세상의 애비들이 길바닥에 뿌리고 간” 쾌락, 즉 남성들의 잘못된 성문화를 비판한다. “아주 잠깐”의 외도로 낳은 혼외자식이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우리한테 와 안”기는 상황은 당황스럽다. “혈연이라는 것/ 참 붉”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내 삶의 “스텝이 꼬”이고 만다. “아찔한” 순간을 “뭐, 어쩌라”는 체념으로 받아들이지만 삶의 그늘은 더 짙어진다.

표제시에서 보듯, “제 것이 되는 순간 함부로 막 쓰”고 나서 후회하는 게 사랑이다. 사람이 남든 떠나든 결국 사랑은 “더 이상 소용없는 한때의 감정”일 뿐이다. 잡화가 된 사랑은 더 이상 재활용되지 않고, 시인은 꽃그늘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가슴 깊이 감춰둔 사연을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 있지
자기만 들어가면 벌써 어두워지는 저쪽

한 번도 뱉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저쪽 사람들은
죽은 자들처럼 감정이 없어야 하지

- ‘골목을 사랑하는 방식’ 부분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박소유. 문학의전당. 136쪽/ 9000원


[시인의 집] 금방 죽을 꽃을 왜 사다 꽂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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