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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하얀 밥풀로 너널너덜해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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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06.1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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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장정욱 시인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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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한 장정욱(1965~ ) 시인의 첫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는 저수지의 물속을 들여다보는 같다. 깊고 어두운 물속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짐작은 되지만 직접 물속에 들어가 본 것이 아니므로 그 속에 사는 것들을 특정할 수는 없다.

햇빛과 어둠, 바람과 구름의 향방에 따라 저수지는 제 속을 슬쩍 보여주기도 하고, 수면을 출렁여 속살을 감추기도 한다. 장정욱의 시는 햇빛 맑은 날, 물가에 앉아 오래오래 들여다보아야 물의 속내를 간신히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물속에서 책 한 권을 건져내었다

물빛에 바랜 에필로그와
물빛에 녹아든 마지막 구절을 찾고 있다

제목과 지은이 모두 지워진 책은
바닥의 평온을 읽기 시작했는지
오랫동안 물속에 고립되었다

의미가 다 빠져나간 줄거리
흐르고 흐르면
다음의 봄이 오고 말 텐데

텅 빈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무릎이 허물어지도록
흐릿해진 밑줄에 몰두하는

뻑뻑한 밤

건져 올린 책 모서리에서 여백마저 흩어지면
더는 기억하지 못할 눈망울로
책 속 주인공이 그를 바라보았다

- ‘물속에 꽂아둔 책’ 전문


먼저 시 ‘물속에 꽂아둔 책’을 읽어보자. 시는 점차 기억 속으로 사라져간 한 사람을 소환하면서 시작된다. 물은 기억이나 감정이고, 물속에서 건져낸 “책 한 권”은 한때 소중했던 사람이다. 죽었을지도 모를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를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고립시킨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세월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상처도 잊히게 해주는 힘을 지녔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의 이름조차 희미해지고, 그와의 갈등도 잘 기억나지 않을 때쯤에야 겨우 그를 다시 떠올린다. “흐르고” 흘러 도착한 봄은 상처에 새살이 돋게 한다. 나는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마음의 그릇에 좋은 기억을 채워 넣는다. 나를 위로하는 것도, 남을 용서하는 것도 그리고 수면 위에서 몽글 몽글 피어오르는 그리움도 결국 나의 몫이다. 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질긴 죄목이었다

젖은 아이를 안고
무지개가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아이의 입이 지워졌다

울음을 모르는 입에서
뚝뚝

이승의 끝과 끝이
파르르 떨렸다

환청의 기저귀를 채우고
빈 젖을 물리고

젖지 않는 오줌
아물지 않는 배꼽

무지개가 늘어지지 않도록
바지랑대를 세워
높이
아이를 널었다

- ‘빨랫줄 저편’ 전문


2018년 수주문학상 수상작인 ‘빨랫줄 저편’은 시인이 수상소감에서 밝혔듯, 30년 전에 겪은 일을 시로 쓴 것이다. 그 경험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이 시가 어린아이(태아)의 죽음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 올라 빨래를 너는 행위를 무지개 너머 하늘나라에 아이를 보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지붕에 올라 살아생전 입던 옷을 흔들며 부르는 초혼을 연상시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늘 죄인의 입장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무친 그리움은 “네 달력이 지워진/ 여름 달력”에 “종종 눈이 내”린다. “헛것 같은 계절”을 무수히 보내도 “더 깊게 내려앉고”(‘거울 속에 노래를 담가놓고’)만다. 슬프고도 고독한 상처가 덧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탯줄을 끌고/ 어디까지 떠나갈 수 있을까”(이하 ‘줄’) 궁금하다. 그리움이 “팽팽한 밤”마다 “너에게 가려고 긴 줄을 늘여놓”기도 하지만 “이승의 끝과 끝이/ 파르르 떨”릴 뿐이다.

“울음을 모르는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눈물)의 이미지는 시집 도처에서 발견된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은 물방울”(‘귀가’), “중얼중얼, 새어나오는 물소리”(‘모자는 모자를 잃고’), “길고 긴 어둠의 소나기”(‘어느새’), “새하얀 발목은 물가의 출렁이는 연애를 상상한다”(‘스카프는 당신에게로 날아간다’), “물그림자와 함께 담아둔 감정”(‘연꽃 암실’), “뒤가 보이면 앞이 흐려지는/ 물방울 속 이름”(‘한 문장이 끝났다’), “쓸쓸한 파문을 숟가락으로 퍼낼 때/ 물 때 낀 불빛이 여러 겹으로 흔들리며”(‘너무 깊어진 식탁’) 등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물속 깊이 숨겨놓은 상처와 고통이다.

가끔 입체감 없는 어린 시절이 튀어나오면 도화지 위에 당신을 그려 넣어요. 조심스럽게 목이며 몸통을 오려내지요. 납작한 엄마가 태어났어요. 아주 작은 당신,

낯선 방에서 잠을 자요. 칠 벗겨진 뒤주 위 엄마 냄새가 나요. 딱딱하면서도 높은 그곳에서 새우잠을 구부리면 종이 인형이 자장가를 불러줘요. 크레파스로 색칠한 옷을 걸치고 나를 안아요. 심장에 묻어나는 그 붉은 소리,

아침이면 종이 인형이 월남치마를 입어요. 뒤주 속 바닥을 긁어 밥을 짓지요. 흰밥에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김, 얼른 커서 나도 엄마가 되고 싶어요.

하도 매만져 엄마의 살갗은 다 해졌어요. 그 치만 두 눈은 한 번도 감긴 적 없죠. 밤낮으로 피곤한 목과 팔다리, 하얀 밥풀로 너널너덜해진 엄마를 붙여요.

- ‘종이 인형’ 전문


시 ‘종이 인형’은 ‘빨랫줄 저편’과 더불어 시인의 상처와 고통, 슬픔의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시 ‘종이 인형’은 ‘빨랫줄 저편’과는 반대로 너무 일찍 죽은 엄마를 아이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는 “위로보다 어두운 상자”(‘격자무늬의 잠’) 속으로 들어가거나 “겨울을 안은 채/ 막다른 사람”(‘한 번도 어깨를 빌리지 못했다’)으로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린 나’는 “도화지 위에” 엄마를 그려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도 매만져 엄마의 살갗”이 다 해지면 “하얀 밥풀로 너널너덜해진 엄마”를 다시 붙인다. “얼른 커서 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는 것은 엄마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슬픔·상처 등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종이로 엄마의 인형을 만들고, 그 종이 엄마와 대화하는 것은 나를 스스로 치유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통근버스를 기다렸다
퇴직한 나를 지나칠 때까지
얼음 속 낙엽의 기분으로 오후를 지냈다

꿈속에서 자주 지각을 했다
시계는 내가 얼마만큼 낡아야 하는지
늙은 감정을 사랑해도 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소설책에선 여주인공이 마흔 살 생일에
남편에게 손수 애인을 골라줬다

오래전 당신은 출장 중이었다
진주알은 늘어진 소문 끝에서 빛나지 않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어둠도 한 장 남았다

달력 끝에 매달려 그네를 타는 아이들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저 순환이
한없이 지루한 계절

먼 별자리를 되돌아 나오는 막다른 질문
골목의 뒷덜미는 아직 물들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집에 없었다

- ‘선물’ 전문


슬픈 상처의 원인인 주변 사람의 부재는 엄마와 아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퇴직한 나는” “습관적으로 통근버스를 기다”리고, 남편은 바람이 나 떠나버렸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견딘, 그네처럼 반복되던 고단한 날들. 이제 장성한 아이들도 떠나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물속에서 “얼음 속 물고기처럼 눈을 감”(‘얼음 수화기’)고, “사라진 나를 다시 한 번 지우고”(‘그믐’) 있다. 아니 어쩌면 물 밖에 몸을 세워두고, 물속 깊은 곳에 자아를 숨겨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내가 사랑한 사람들도 다 부재중이다.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장정욱. 달아실. 120쪽/ 8000원.



[시인의 집] 하얀 밥풀로 너널너덜해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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