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속보
VIP
통합검색

'천안문 사태' 강력대응 中, 홍콩엔 한발짝 물러선 이유

머니투데이
  • 이재은 기자
  • 카카오톡 공유하기
  • 카카오톡 나에게 전송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 문자
  • VIEW 9,312
  • 2019.06.24 08:09
  • 글자크기조절
  • 의견 남기기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②] 베이징, 중국인들에게 상징적인 데다가 시위 확산 가능성 높아 강력 진압… 홍콩 우산혁명 시위는 내부서 분열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중국 베이징 천안문 /사진=위키커먼스
중국 베이징 천안문 /사진=위키커먼스
'천안문 사태' 강력대응 中, 홍콩엔 한발짝 물러선 이유
몇년 전 중국 베이징에 놀러가서 천안문 광장을 둘러봤다. 11월이라 쌀쌀했는데, 마침 비까지 내려 어딘가 씁쓸했다. 관광객 수 보다 월등히 많은 공안 수는 을씨년스러움을 한결 고조시켰다. 추적추적비를 맞으며 천안문 사태를 생각했다.

이후 광저우 출신 중국인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천안문 사태 알아?"… 모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안다"고 답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런 얘긴 하기 좀 그런데"라고 말을 흐렸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교과서에서 배우나?"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있었다고 들었다"고 답했다.

이어 "해보진 않았으나 검색을 하면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안다"면서 "중국인 모두 어떤 좋지 않은 일(천안문 사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는 마치 '금기'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천안문 사태는 1989년 6월4일 베이징 중앙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과 시민들을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1989년 4월말부터 계엄령이 선포된 5월20일까지 천안문 광장에는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2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덩샤오핑(1978~1983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1989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모인 인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았고, 이 자리에서 최소 500명이 사망했다.
1989년 5월 19일, 상하이의 대학생들이 베이징에 연대한다는 의미의 현수막을 설치했다.
1989년 5월 19일, 상하이의 대학생들이 베이징에 연대한다는 의미의 현수막을 설치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이 경제적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도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 영국 지배하 경제가 번영하고 민주주의 의식이 발달한 홍콩에는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홍콩은 1841년부터 156년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됐다. 영국의 홍콩 지배 기간을 거치면서 홍콩은 세계 최고의 무역항으로 거듭났다. 영국은 행정제도, 사회기반시설, 공공서비스 등을 그대로 홍콩에 이식했고, 꽤 합리적으로 식민지를 운영했다. 많은 홍콩인들은 영국에 대한 반감이 적고 이 시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홍콩은 이 시기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아시아의 중심 무역축으로 성장했고, 영국이 만든 사회 기반에 따라 민주주의 의식도 높아졌다.

이에 중국 반환 직전 홍콩에서는 불안감이 고조됐다. 영국식 사회 시스템에 오래 길들여진 홍콩인에게는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으로의 회귀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천안문 사태를 지켜봤었기에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도 컸다. 수 많은 중산층 홍콩인은 불확실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민을 떠났다. 중국 반환을 전후로 당시 홍콩 인구의 10%인 65만명에 달하는 홍콩인들이 캐나다, 미국 등으로 해외 이민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7월1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인수인계됐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고, 홍콩특별행정구가 탄생했다. 중국 정부는 경제현대화의 첨병인 홍콩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었다.

홍콩 반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이후 마카오 반환과 대만과의 통일 등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도 봤다. 장쩌민(1993~2003년 중국 국가 주석)은 1997년 6월30일 밤 홍콩 반환식 경축사에서 "1997년 7월1일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만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면서 "홍콩주권의 반환은 중국 민족의 축제이자 전세계 평화와 정의의 승리"라고 말했다.
홍콩 카우룽 나단로드 전경 /사진=위키커먼스
홍콩 카우룽 나단로드 전경 /사진=위키커먼스
당시만해도 홍콩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국이 비해 월등했다. 이에 중국 정부도 홍콩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고 고도의 자치를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쩌민은 홍콩 반환식 경축사에서 "일국양제" "홍콩주민의 홍콩통치" "고도의 자치" "50년 불변" 정책을 확고하게 이행해 홍콩의 기존 사회경제체제와 생활방식 및 법률을 기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동안은 이대로 진행됐다. 그동안 중국을 향한 우려는 기우였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이 어느 정도 경제력을 키우기 시작하고, 국제적으로도 발언권을 갖게되면서 상황은 달라져갔다.

2003년 후진타오(2003~2012년 중국 국가 주석)의 임기 시작과 함께 중국의 홍콩을 향한 태도는 급격히 달라졌다. 후진타오는 중국이 부상하면서 홍콩과의 역학관계가 달라졌다고 봤다. 이에 '양제'를 강조한 기존의 홍콩 인식을 조정하고 그동안 '양제'에 놓였던 방점을 '일국'으로 조정하고자 했다. 중국의 홍콩에 대한 인식 조정 노력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았다. 중국이 '일국'을 강조할수록 홍콩의 반감도 커져갔다.

이때부터 홍콩에 반중국시위가 빈발했다. 2003년 7월, 기본법 23조를 근거로 중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안전법) 제정을 시도하자 50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에 나섰다. 2012년에는 친중 성향의 국민 교육과목을 필수 도입하려는 시도에 고등학생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시진핑 주석 /사진=뉴시스
시진핑 주석 /사진=뉴시스
중국의 국가주석이 시진핑(2013년~현재 중국 국가 주석)으로 바뀌면서 '일국' 지향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중국몽(시진핑이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 오른 직후 내세운 것으로, 봉건왕조 시기 조공질서를 통해 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전통 중국의 영광을 21세기에 되살리겠다는 의미)을 실현하고자 하는 시진핑은 홍콩 민주화에 대해 특히 부정적이었다.

시진핑은 '백서'를 발간해 '일국양제'의 전제가 '일국'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아가 홍콩의 자치 가능성을 축소했다. 홍콩 행정수반 선거 후보자 추천 방식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제한했다. (☞ "물러날 수 없다"… 한국 '촛불혁명'과 홍콩 '우산혁명'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①] 참고) 그렇게 2014년 9월부터 약 79일간 '우산혁명'이라는 이름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50만명에 달하는 홍콩 시민들은 홍콩 행정수반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우산 혁명 시위를 벌였다.
 '홍콩 우산 혁명'을 지지하는 집회가 뉴욕과 보스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미 잔역의 주요도시에서 잇따라 열리는 가운데 우리 국민들의 안전도 우려되고 있다. 전시회를 위해 현재 홍콩에 머물고 있는 동아대 미술과 김명식 교수는 2일 시위가 점차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특히 1일엔 쇼핑과 관광으로 잘 알려진 침사추이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일반 시민들이 많이 가세하고 있다. 시위 진원지인 센트랄 금융거리는 현재 거의 차단되어 자동차도 이면도로로 우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은 침사추이 거리에서 시민들의 연좌농성. 2014.10.02. <사진=Newsroh.com 제공> robin@newsis.com/사진=뉴시스
'홍콩 우산 혁명'을 지지하는 집회가 뉴욕과 보스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미 잔역의 주요도시에서 잇따라 열리는 가운데 우리 국민들의 안전도 우려되고 있다. 전시회를 위해 현재 홍콩에 머물고 있는 동아대 미술과 김명식 교수는 2일 시위가 점차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특히 1일엔 쇼핑과 관광으로 잘 알려진 침사추이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일반 시민들이 많이 가세하고 있다. 시위 진원지인 센트랄 금융거리는 현재 거의 차단되어 자동차도 이면도로로 우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은 침사추이 거리에서 시민들의 연좌농성. 2014.10.02. <사진=Newsroh.com 제공> robin@newsis.com/사진=뉴시스
우산혁명은 꽤나 오랜 기간 진행됐고(79일간), 또 많은 이들(50만명)이 참여하면서 전세계 이목을 끌었다. 당시 우산혁명 시위 참가자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보통선거를 달라" "우리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들(시위 반대자)은 대의 명분이 없다" 등의 주장을 했다.

이에 반해 중국 당국은 "이번 시위로 홍콩 시민들이 충격과 공포에 빠져 위협을 느끼고 있다" "렁춘잉 홍콩 행정장관에 대한 사임 요구는 불합리하며, 시위대는 황색동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격함은 보통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홍콩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이다" "시위대의 점거가 홍콩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등의 주장을 했다.
홍콩 시위대가 15일 정부청사가 있는 깜종(金鐘) 외곽에 있는 주요 도로에서 우산으로 경찰이 쏜 후추 스프레이를 막고 있다. 홍콩에서 2주 넘게 정치적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날 수많은 경찰관들이 정부청사가 있는 이 지역 외곽에 있는 터널에서 시위대 정리 작업에 동원됐다. 시위 진압 장비를 갖춘 경찰관들이 시위대에 후추 스프레이를 뿌려 시위대를 진압하고 지하도 주변에 세워진 바리케이드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철거했다. 2014.10.15/사진=뉴시스
홍콩 시위대가 15일 정부청사가 있는 깜종(金鐘) 외곽에 있는 주요 도로에서 우산으로 경찰이 쏜 후추 스프레이를 막고 있다. 홍콩에서 2주 넘게 정치적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날 수많은 경찰관들이 정부청사가 있는 이 지역 외곽에 있는 터널에서 시위대 정리 작업에 동원됐다. 시위 진압 장비를 갖춘 경찰관들이 시위대에 후추 스프레이를 뿌려 시위대를 진압하고 지하도 주변에 세워진 바리케이드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철거했다. 2014.10.15/사진=뉴시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우산혁명은 흐지부지 끝났다. 많은 수의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의 논리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2014년 홍콩중문대 여론연구소의 우산혁명 지지여부 조사에 따르면 우산혁명은 홍콩 시민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고학력인 범민주파지지 성향의 10~20대 젊은이들에게서만 지지를 받았다. 40~50대 이상으로 이미 경제적인 기반이 있는 고소득층은 홍콩 도심지를 장기간 점거하는 시위가 초래하는 불편함에 주목했고, 홍콩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에 우산혁명을 이끌었던 베니타이 교수 등 3인방은 2014년 12월3일 시위를 이끈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자수했다. 베니타이 교수는 또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시위 중단을 권유했다. 그는 글에서 "센트럴 점령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며 "이제 우리는 민주화를 위한 다른 전략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우산혁명 시위가 대만과 마카오를 포함해 소수민족 분리시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시위 대응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우산혁명시 천안문 사태 때처럼 강력하게 대응하진 않았다. 첫째는 이처럼 홍콩내 시위를 두고 홍콩인들 사이에서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엇갈려 중국 정부가 개입해야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홍콩 야경 /사진=위키커먼스
홍콩 야경 /사진=위키커먼스
두번째는 중국 정부는 홍콩의 시위가 곧바로 대륙 전체로 확산할 것이라곤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홍콩이 '경쟁력 있는 지방정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국의 대륙 중 아주 작은 섬에 불과하므로 베이징과는 그 중요성에서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베이징은 중국의 800년을 이어온 전통적·역사적 수도로서, 중국의 정치·행정·문화가 집약된 곳일 뿐 아니라 주요 상업·금융의 중심지다. 국가건설 전부터 무수한 정치투쟁과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이어져왔으며 베이징대(北京大)·칭화대(淸華大) 같은 국제적 대학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도시다.

천안문 사태 때도 그러했다. 서로 다른 도시의 학생 지도자들 사이를 전화 등이 연결시켜줘 어느 때 보다도 쉽게 소식이 전파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모든 연락은 꼭 베이징을 거쳐야 이루어졌기에 실질적 중심지로서의 베이징의 역할은 더욱 컸다. 이에 중국은 천안문 사태가 다른 대규모 시위 보다 전국적 확산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보아 강력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앞으로 중국은 '중국몽' 실현을 위해 더욱 홍콩을 중국 정부의 손 아래 두려고 할 것이다. 물론 최근의 '송환법 추진' 100만 반대 시위처럼 중국 정부에 대한 반발이 빗발칠 것이고, 이 과정 홍콩인의 홍콩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강해지겠지만 말이다. 다음 편에서는 홍콩인과 중국 본토인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짚어보고 이들의 생각 차이를 알아 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③] 계속

참고문헌
반정부시위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 연세대, 성별희
홍콩 민주화 시위에 나타난 정체성의 정치 분석, 서울교대, 박서현
홍콩의 반환과 중국의 장래, 배재대, 김소중




머니투데이 주요뉴스

2300 깨진 날, 개미는 참지 않았다…"제발 공매도 좀 막아"

네이버 메인에서 머니투데이 구독 카카오톡에서 머니투데이 채널 추가

베스트클릭

오늘의 꿀팁

  • 날씨
  • 건강쏙쏙

많이 본 뉴스

부꾸미
제 1회 MT골프리더 최고위 과정 모집_220530_220613
사회안전지수

포토 / 영상

머니투데이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