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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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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07.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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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구정혜 시인 ‘말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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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한 구정혜(1959~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말하지 않아도’는 온전히 투병기다. 4년 전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표적치료제로 고비를 넘긴 시인은 치료 후 요양병원에서 겪은 삶의 공허와 애착,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시로 승화시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등바등 살아온 날들이 문득/ 바보 같다”(‘그냥’)고 느끼는 순간 시인은 인생을 되돌아본다. 투병과 시 쓰기를 병행하면서 밖으로 향하던 시선은 내 몸과 마음으로 전환되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시인의 말’) 또한 많이 달라진다.

산기슭에 크루즈 한 척
세상에서 떠밀려 온
많은 섬을 싣고 있다

1인실에 하나
3인실에 셋
다인실에 여러 개의 섬

한때는 푸른 바다 마음껏 누볐던 이들
층마다 칸마다 섬으로 남겨져 있다

여태까지의 버거웠던 삶을 내려놓고
가장 가벼워진 몸짓으로
제각각 부화를 준비한다

어둠이 배를 들어 올리려 주변을 에워싸자
급기야 스크루 소리를 내며 스팀이 들어오고
닻을 올리듯 커튼을 슬몃 젖힌다

달이 떠간다
아주 천천히

목적지는 같은데
나침반을 잃은 선장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계속 정박 중이다

- ‘여행 2 -요양병원’ 전문


시 ‘여행 2 -요양병원’은 한적한 산기슭에 있는 요양병원의 초저녁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요양병원을 크루즈로, 환자를 섬으로 환치한다. 크루즈를 타고 신나게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푸른 바다 마음껏 누볐던 이들”을 태우고 정박해 있다. 크루즈는 어서 병(病)이 나아 여행을 떠나고 싶은 염원을 담고 있다. “세상에서 떠밀려 온/ 많은 섬”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스스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왔기에 더 애잔하다.

요양병원에 오기 전에 주변을 정리한 시인은 “가장 가벼워진 몸짓으로” 새로 태어나기를 희망한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자 “스크루 소리를 내며 스팀이 들어”온다. 창가에 선 시인은 “닻을 올리듯 커튼을 슬몃 젖”혀 밖을 내다본다. 크루즈는 그 자리에 있고 달만 “아주 천천히” 떠간다. 한적한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달은 분명 서정적이지만 요양병원인지라, 특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계속 정박 중”인지라 슬픔은 극대화된다.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저만치 서서 쳐다보는 이 있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하다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암 진단 받은 에미 때문에
슬픈 결혼식이 될까봐 마음 졸이던 딸
서로 눈 마주치지 말자고
기쁜 날은 기쁜 것만 생각하자고 다짐하며
가발 쓴 나에게 슬몃 웃음 지어 보이던 내 딸

춘삼월 하순, 꽃샘추위다
맵싸한 바람이 뺨을 후리더니
허공이 캄캄하도록 눈발이 날린다
삽시간에 꽃 위에 맑시린 눈이 쌓여
생강나무꽃 울상이다

딸아, 살다 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듯이
뜻하지 않은 굴레가 있고 벽도 있단다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지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유럽 여행 갔던 문우도
한창 농사일에 바쁜 시골 친구들도
만사 제치고 축하해주니

난 이만하면 잘 살았다

- ‘생강나무꽃’ 전문


시인이 매일 “서리산 둘레길 7km를 걷는”(이하 ‘산책길’) 것은 “폐에 이상이 있다는 검진으로” 가슴을 활짝 펴고 “깊은 호흡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혼자 “산책로를 걷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딸이 산책하고 있는 엄마를 금방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시인은 결혼을 앞둔 딸과 꽃샘추위에 눈을 맞고 서 있는 생강나무꽃을 동일시한다.

눈이 마주치면 울음이 터질까봐 애써 딴 곳을 바라보는 딸에게 엄마는 조곤조곤 들려준다.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지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단”다. “만사 제치고 축하해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난 이만하면 잘 살았단”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아마 “그러니 딸아, 울지 마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가 아닐까. 여운이 주는 울림이 묵직하다.

물처럼 살고자 했던
그 여자

신데렐라처럼 온몸으로 사랑받는
봉선화와는 달리
축축한 그늘에서 산다

언제나 뒤편에 서서
뭇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제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멀어져 간다

태풍 영향으로
비가 찔끔거렸는지
물봉숭아 눈이 퉁퉁 부었다

새벽에 난소암 투병하던
옆자리가 비워졌다

- ‘물봉숭아’ 전문


시 ‘물봉숭아’에서 같은 병동 옆자리의 환자는 난소암을 앓고 있다. 시인은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살고자 했던/ 그 여자”를 물봉숭아로 환치한다. 여성의 난소와 물봉숭아의 생김새가 닮았다는 것에 대한 연상 작용이다. “축축한 그늘”에 사는 물봉숭아와 달리 뜰이나 장독대와 같은 양지에서 자라는 봉선화는 뱀의 접근을 막아준다고 하여 금사화라 부른다. 붉은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반면 물봉숭아는 “언제나 뒤편에 서서/ 뭇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말없이 바라”보는 희미한 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없다. 죽음을 직감한 옆자리 환자는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운다. 그날 “새벽에 난소암 투병하던/ 옆자리가 비워”진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목도한다. 옆자리 동료 환자의 죽음은 ‘다음 내 차례구나’라고 인식, 자신이 죽는 것과 비슷한 공포를 느낀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중독인 시(詩)와 산책길의 사색과 “사람을 품고 있는”(‘사람을 품다’) 마음 덕분이다.

표제시 ‘참숯’은 참나무를 통해 힘든 삶 속에서도 거짓되지 않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탄하지 않은 곳”은 장소에 한정되기보다 척박한 환경, 즉 ‘삶’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가난을 물려받은 삶은 결혼 후에도 “동동거리며 살” 수밖에 없다. 부지런히, 알뜰히 살다 보니 많은 재산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만큼의 “먹거리가 생겼”다.

명예나 출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지만 의식의 깊은 지층에는 문학에 대한 마그마가 끓고 있다. 지천명의 나이에 시작한 시작(詩作)는 여유라기보다 열망이면서 삶의 존재 이유다. 가난했지만 거짓되지 않은, 참된 삶을 살고 싶은 것은 시(詩)라는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참숯’이 되는, 그런 참나무처럼 살고 싶은.

◇말하지 않아도=구정혜. 시산맥. 126쪽/ 9000원


[시인의 집]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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