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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지린내 물씬 풍기는 오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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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08.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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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오탁번 시인 ‘알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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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오탁번(1943~ )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알요강’은 시집이면서 훌륭한 시창작 교재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시 창작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그냥 쓰면 된다는 걸 이번 시집을 통해 실증하고 있다. ‘시가 이런 것’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다양한 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아,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구나. 이렇게 시를 쓰면 되겠구나’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준다.

4부 76편이 수록된 이번 시집에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는 서정의 세계, 낙향해 겪는 생활 속 이야기, 죽음에 대한 생각, 시로 보여주는 시 창작 강의, 식민사관에 대한 신랄한 현실비판, 먼저 떠난 시인들에 대한 추모, 우리말에 대한 애정 등을 뛰어난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가히 시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하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신설동 육교 위에
‘기생충 박멸하여 86 88 빛내자’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잘 치르자는
서울특별시의 친절한 계몽주의렷다?
백의민족 뱃속에서 반만년 동안 살고 있는
십이지장충 촌충 요충을 잡아내어
관광객에게 박제품으로 판매라도 할 속셈?
깨끗해진 뱃속 내시경으로 찍어서
사진전이라도 열 꿍꿍이?
세월이 아득히 흘러갔지만
기억의 그늘 속으로
그 현수막이 떠오를 때마다
현수막을 만든 놈
박멸하고 싶은 생각 굴뚝같다

- ‘기억의 그늘’ 전문


먼저, 새벽 찬물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시 ‘기억의 그늘’부터 살펴보자. 이 시는 기억의 한 갈피에 그늘진 한 장면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아니 회상이라기보다 신설동 부근을 지날 때마다 육교 위에 걸려 있던 현수막이 불현듯 떠오른다. 시인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기생충 박멸”과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빛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우리 뱃속 이렇게 깨끗해’ 하면서 까뒤집어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시인은 이런 엉뚱한 행위를 “서울특별시의 친절한 계몽주의”라면서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힐난한다. “세월이 아득히 흘러갔지만” 시인은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심정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1894)은
동학을 진압한 일본을 업고
친일파들이 일으킨 전란이므로
갑오왜란甲午倭亂이라고 해야 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1896)은
고종황제가 정치적 망명을 했으니까
아관망명俄館亡命이 맞다면서
식민사관 명칭을 고쳐야 한다는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말씀
암 옳다마다!
1972년 영남의 어느 선비가
사학자 이병도 박사를
일본 고정간첩이라고
대구고검에 고소한 적이 있다
식민사관 퍼트려서
민족의 영혼을 팔아먹었으니
일본의 고정간첩 아니냐는 말씀
암 맞다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민비閔妃라 하고
조선朝鮮을 이조李朝라고 하는 놈들
모조리 혀를 잘라야 한다
옹졸한 삼국통일만 강조하고
광활한 발해 역사를 도외시하는 놈들
깡그리 불알을 까야 한다
아직도 식민사관 주장하는
매국노 사학자들 낱낱이 색출하여
몽땅 살처분이라도 해야 한다
세 치 혀를 놀려
미국 미국 하는 놈들
일본 일본 하는 놈들
중국 중국 하는 놈들
사대주의 유전자 못 버리고
학계와 정계 구석구석 숨어서
고정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
정유년 닭띠 해
설날 아침
이 몹쓸 놈들 마빡 겨누면서
벼슬빛 칼날 벼린다

- ‘신년사’ 전문


시인은 시 ‘자화상’에서 학교에 다닐 때 “식민사관 역사를 배운 탓”(이하 ‘자화상’)에 올바른 역사관을 갖지 못했다며 “자화상을 찢어버리고”, “못난 영혼을 지우고” 싶다고 한탄한다. 시 ‘자화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 ‘신년사’는 오탁번 시의 특징인 아이 같은 천진함과 익살, 능청, 풍자, 해학, 서정 대신 서늘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정유년 닭띠 해”는 2017년이므로 2년 전에 쓴 시다.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말씀”이 2017년 1월 12일 자 한 중앙지 기사를 인용한 것이므로 “설날 아침”에 쓴 시는 아니다.

이 시는 세 단락으로 나눠 져 있다. 갑오경장을 갑오왜란으로, 아관파천을 아관망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말씀”과 “1972년 영남의 어느 선비가/ 사학자 이병도 박사를/ 일본 고정간첩이라고” 고소한 사건, 그리고 명성황후를 민비로, 삼국통일만 강조하고 “광활한 발해 역사를 도외시”하는 매국노 사학자들과 사대주의자들을 처단하자는 내용이다.

시인은 식민사관과 사대주의 극복을 주창할 때마다 “암 옳다마다!”, “암 맞다마다!”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깡그리 불알을 까야” 하고, “몽땅 살처분이라도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사실 시라고 하기보다 주의주장에 가깝다. “이 몹쓸 놈들 마빡 겨누면서/ 벼슬빛 칼날 벼린다”는 마지막 시적 문장이 시의 품격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시를 쓴 것은 주제의식이 강할 때는 직설화법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노 시인의 일갈은 큰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동안에 시가 통 안 써졌다
쓸개가 탈이 나서 시가 안 써진다?
허허, 그것참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 시는
외로운 내 영혼이 쓴 게 아니고
쓸개가 썼단 말인가
시가 도무지 안 써지는 어느 날
시인 노릇 아예 작파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내 소식을 뒤늦게 들은
제천 동물병원 김선생이 전화를 했다
- 사리는 안 나왔다고요?
그는 암소처럼 웃었다
- 사리는 큰스님이라야 나오지!
나는 송아지처럼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대웅전 목탁 베고 낮잠 든
철부지 동자승이나 된 듯 했다

- ‘시창작론’ 부분


어느 해 세밑에 시인은 급성 담낭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진다. 초음파, CT, MRI 검사를 해도 담석이 보이지 않아 “열흘 동안 금식하면서/ 항생제 치료”를 받고 통원치료를 한다. 몸이 아파 시를 쓸 수 없는 것이지만 “쓸개가 탈이 나서 시가 안 써진다?”는 데 생각이 머문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 시”는 “쓸개가 썼단 말인가” 의심한다. 아니 비약한다. 이제 “외로운 내 영혼”에 방점을 찍고 가만히 생각해보자. 제목이 왜 ‘시창작론’인지를. 쓸개 빠진 놈처럼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지 말고 고독한 영혼으로 시를 쓰라는 게 아닌지. 심각한 것일수록 에둘러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아닌지.

“제천 동물병원 김선생”의 전화 한 통화에 시 분위기는 급반전한다. “사리”를 통한 선문답에 시인은 “대웅전 목탁 베고 낮잠 든/ 철부지 동자승”을 연상한다. 하나의 시어가 어떻게 연상작용을 일으키고, 이것이 어떻게 시적 문장으로 흘러나오는지,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표제시 ‘오줌길’에는 “올레길 자드락길 두레길” 말고도 쑥부쟁이, 밭두럭, 산비알, 느럭느럭 등 순우리말이 많이 나온다. 시인은 시를 쓸 때 국어사전을 곁에 두고 수시로 펼쳐본다. 신문을 볼 때도 모르는 우리말이 나오면 눈이 번쩍 뜨인다. 물론 이걸로 시를 쓰기도 한다.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에 대한 노동신문 논평”(이하 ‘노루잠’)에 노루잠이라는 말이 나오자 “여의도 시러베들은/ 입만 열면/ 되지도 않은 외래어를 나불댄다”고 일갈한다.

시인은 “억새 이랑 물결치는 산비알”에서 바지를 내리고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매국노 사학자, 사대주의자, 전시행정을 일삼는 정부관료, 우리말 대신 외래어를 남발하는 국회의원,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오줌 줄기를 선사하고 있다. “쏴 소리도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알요강=오탁번. 현대시학사. 204쪽/1만원.


[시인의 집] 지린내 물씬 풍기는 오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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