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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흡혈귀거나 기생충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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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영권 경제부장
  • 2019.09.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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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 12년 충청도 연산에 사는 순례라는 여인이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먹은 사건이 발생했다. 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경위를 파악해 보니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상황에서 아이들이 죽자 삶아 먹은 것이지 일부러 죽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순례를 끌고 와 보니 굶주림에 시달려 몰골은 사람다운 구석이 없고 흉측하기가 귀신과 같았다.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경신대기근 때 일이다. 굶어 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은 이들이 산과 들에 널린 때다. 적게는 수십만, 많게는 백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조선 인구는 많아야 800만이었다.

'왜란 때도 이보다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혹했던 일들이 일상이었던 현종 재위 기간에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죽은 왕비를 위해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지 싸우는 이른바 예송논쟁에 골몰할 뿐이었다.

정치권의 관심이 서민의 삶과 단절돼 있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대한민국에도 안타까운 죽음은 넘쳐난다. 지난달 서울 봉천동의 임대아파트에서는 숨진지 한 달이 지난 탈북자 모자가 발견됐다. 통장은 잔고가 0으로 찍혀 있었고 냉장고에는 먹을거리라고는 고춧가루밖에 없었다. 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 1일에는 서울시 강서구 한 임대아파트에서 50대 남성이 병을 앓고 있던 80대 어머니와 중증 지체장애가 있는 형을 숨지게 하고 자신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4일 대전에서는 40대 가장이 아내와 두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는데, 일곱달 밀린 우윳값 고지서가 발견됐다.

대기근에 견줄 수 있는 경기침체에 대한 경고음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나타내 수요감소와 물가하락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디플레이션의 공포도 엄습했다.

하지만 정치권이 보여준 건 온통 특정 인사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게 적절하냐를 놓고 치고받는 일이었다. 양쪽으로 갈려 서로 상대편에 대해 국민이 더 분노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이 서민들의 아우성은 잊혔다. 어쩌면 그들에게 정의란 전체 공동체 구성원에게 좋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악은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 자신들의 진영에 불리한 것이다.

정치와 행정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좌절하고 무기력해진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여행한 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의 관료와 양반들을 흡혈귀와 기생충으로 묘사했다. 비숍이 조선을 처음 찾았을 때 백성들의 나태한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사정을 보니 수탈을 당하는 게 일상인 그들에게 게으름은 최고의 방어막이었다. 반면 비숍은 조선 관료와 양반들에게서 벗어나 만주지역에 이주한 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한민족을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이라고 가능성을 간파했다.

연애 결혼 출산 취업 등을 포기한 'N포세대'라는 표현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어쩌면 한국 사회가 그때와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치권에서 최근 벌어지는 다툼을 보고 지지정당이 없다는 무당층이 증가한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왔는데, 이런 이들에게 지지정당을 꼽으라는 건 흡혈귀와 기생충 가운데 어느 것이 덜 나쁜지 고르라는 것만큼 난감한 일일지 모르겠다. 21세기 한국의 정치에 우리의 잠재력을 가로막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까.
[광화문] 흡혈귀거나 기생충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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