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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생애 어딘가에서 유배당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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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10.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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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오민석 시인 ‘굿모닝, 에브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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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한 오민석(1958~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은 운명이나 삶(생계)에 패배하지 않으려는 굳센 의지를 드러낸다. 한때 좌절하고 패배했을지언정 가난과 고통을 참고 견뎌 끝내 뜻한 바를 이루는 긴 여정을 담고 있다. 문학평론가 겸 영문학자답게 해외 문학작품이나 화가, 학자, 지명 등 많은 외국어를 차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거북·낙타·호랑이와 같은 동물의 상징성을 통해 정신적인 승리를 염원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종종 드러내고 있는 ‘죄의식’은 종교나 내적 갈등보다 가난이나 사회모순 같은 외부환경에서 기인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四季)는 계절이 지닌 속성과 상징, 인생의 성장단계와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의 행보가 경쾌해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언어와 문장,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체계와 의미를 놓칠 수 있고, 그러면 ‘시의 맛’을 절반쯤은 잃은 셈이 된다.

봄이 오지 않는다
라면 봉지, 찢어진 팬티, 불어터진 우동 가락, 썩은 양파,
얼어 죽은 고양이, 젖은 생리대,
유효기간이 지난 통조림들이
무슨 화산재처럼 세상을 덮고 있다

벽 속의 개,
말할 수 없다

- ‘벽 속의 개’ 전문


시인의 봄은 불행하다. “미장이 아버지가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는 동안, 나는 골방에 쑤셔 박혀 헤겔을 읽거나 화창한 봄날이면 김수영과 함께 고궁(古宮)”(‘푸른 잎새 사이로 태양은 지고’)을 거닌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 한밤에 들어오지만 시인은 (영)문학에 빠져 있다. 장남의 특권으로 공부를 계속 하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 묻어난다.

문제는 “죄의 새끼들이 죄의 새끼들을 낳는다”(이하 ‘쌍계사 벚꽃길의 연어 떼’)는 것이다. “오직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인 것들은 죄가 없다”고 자위해보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생계에 대한 불안과 죄의식을 떨쳐버리기엔 한계가 있다. 시인의 주변에는 불어터지고, 썩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과 주검, 사용할 수 없는 물건들이 “화산재처럼” 덮여 있다. 그런 환경에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시인은 “벽 속의 개”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묻는다, “너는 아직 봄인가, 지옥이여”(‘지옥의 묵시록 3’). 봄은 봄이로되 아직 봄이 아니다.

초록 이파리들 멸치 떼처럼

대지로 쏟아질 때

나는, 아직 건재한가

6월의 나무들은

온 세상을 흔들어 깨우고

바람 불고 불어

나는, 종일 허기지다

- ‘6월의 나무들’ 전문


시인의 여름은 불안하다. 여름이 젊음의 계절이라지만 “불안한 청춘들”(‘빈센트 블루스’)은 방황한다. 사회정의와 신념, 이념을 위해 “행동하거나”(이하 ‘이데올로기의 내부에는 모순이 없다’) “개인들을 주체들로 변형”시키려 하지만 군부가 장악한 권력, 부의 편중이 심화한 황금만능에 빠진 사회는 ‘지옥의 묵시록’과 다르지 않다. 그런 사회를 변혁하겠다고 외치던 그가 확인하고자 하는 ‘건재’는 생사확인보다 인내하면서 투쟁하겠다는 선언이다.

작고 볼품없지만 뼈대 있는 “멸치 떼처럼” 대지(거리)로 쏟아져 나온 “초록 이파리들”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외쳤던 청춘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 국부독재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외쳐 “온 세상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학문과 사회변혁을 위해 투쟁하느라 정작 시작(詩作)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세월이다. “종일”은 평생과 다르지 않고, “허기지다”는 이루었으되 다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을비 내려
가슴에 단풍 젖으니
시절이 하 수상하다
다산 강진 가는 길
구절초가 만발인데
세월이 자꾸 둥둥 떠간다
너 어디쯤 밀리고 있니
수천 년째 길 떠나는 철새들
여행의 끝은 사랑인가
허나 길은 길로 이어질 뿐
정처가 없다
생애 어딘가에서 유배당한 느낌
사라진 호랑이는 어디서 울고 있나
그대 아직 한참 더 가야 하니
외로움을 피하지 마라

- ‘가을, 강진’ 전문


시인의 가을은 외롭다. “단풍잎 하나 주워”(이하 ‘단풍’) 들고 “마주 오던 여자”에게서 “붉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 여유를 찾았지만 아직도 “시절은 하 수상”하고, “예언이 필요”(이하 ‘풍란’)할 만큼 “시대가 아프”다. “예언의 거북이 등을 밟고 호랑이는 떠났”다지만 원하는 미래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시인의 정신을 상징한다. “사라진 호랑이가 어디서 울고 있”지만 세상사에 패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임을 시인은 다짐한다.

다산 정약용은 18년의 강진 귀양살이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시 ‘가을, 강진’은 시인보다 학자로서의 삶을 우선시했음을 고백한다. 많은 책을 썼지만 정작 시인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아쉬움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학자의 길이나 시인의 길이 다르지 않음에도 “세월이 자꾸 둥둥 떠”가고, 시인의 삶에서 자꾸 멀어져 “유배당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생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진정 가고자 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시인이로되 아직 시인이 아니다.

거기는 눈이 내리나 봐요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보르헤스를 읽었습니다 북창동 골목에서 문득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리 꺾인 개미가 밥풀 하나를 물고 도망치는 주방에선 순두부가 끓고 있겠지요 제 영혼은 어느새 비등점을 넘어버렸어요 기화된 정신의 파편들만 둥둥 떠다니지요 나란히 줄 선 장독대들 대책 없이 눈 맞고 있는 풍경 속으로 잠시 내려가고 싶습니다 거기는 눈이 내리나 봐요

- ‘편지’ 전문


시인의 겨울은 쓸쓸하다. 시인은 “오직 생계만 남은 생계가 두려”(이하 ‘귀가’)워 “겨울이 싫”다. 그나마 가끔 술 한 잔, “밥 한 술 나눌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 날이면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보르헤스를 읽”거나 “꼬박 삼일 동안 원고”(‘해 저물다’)를 쓴다. 인생의 겨울이 왔지만 학문에 매진했던 봄과 다르지 않다.

“시(詩)를 쓰는 일은 일종의 격투”(‘아킬레스 홀드’)임을 모르지 않지만 시에 전념할 수 없는, 생계라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상황이 발목을 잡고 있다. 혜택받은 장남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새로 가정을 꾸린 자식들까지…. “아내가 노동하는 동안 절망의 시를 쓴 것을 후회”(‘너무나도 현실적인’)할 만큼 시인의 내면에는 미안함과 죄의식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영혼은 어느새 비등점을 넘어버렸”고, “기화된 정신의 파편들만 둥둥 떠다”닌다. 설상가상으로 정신적 의지처인 “아내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시인의 말’). 스트레스 중에서 배우자의 사망이 가장 높다고 한다. 잠시 고향 집에 내려가 “나란히 줄 선 장독대” 위에 소복소복 쌓이는 함박눈을 바라보는 휴지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호랑이는 왔으되 아직 호랑이는 오지 않았다.

당신, 보고 싶어,
라고 쓰고 운다

- ‘저 푸르른 죄의 기억’ 전문


◇굿모닝, 에브리원=오민석. 천년의시작. 112쪽/10000원.


[시인의 집] 생애 어딘가에서 유배당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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