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저물가...KDI "한국은행이 안 보인다"

/자료=KDI

지난달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한 최근의 저물가 기조를 벗어날 열쇠가 한국은행의 손에 있다는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가 나왔다. 물가안정을 위한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 통화정책인만큼,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에만 집중하고 금융안정은 다른 정책수단에 맡겨야한다는 분석이다.


28일 KDI가 발표한 '최근 물가상승률 하락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3분기까지 이어진 물가 하락은 대체적으로 농산물과 석유류 가격의 급락 등 일시적인 공급 충격에 따른 것이고,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에서 디플레이션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KDI는 비록 경기 침체를 동반한 디플레이션이 아니지만 최근의 저물가 역시 고착화될 경우 디플레이션과 같은 부정적 영향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규철 KDI 연구위원은 "물가상승률이 낮아지면 기대인플레이션도 낮아져 실질금리를 올리고 경기가 제약될 수 있다"며 "디플레이션과 낮은 물가상승률은 정도의 차이일 뿐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만큼 저물가 그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바라봤다.

KDI는 이 같은 저물가 기조를 전세계 공통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 물가상승률 추세가 하락했지만 경기 회복과 함께 반등해 각국의 물가안정목표 수준을 회복했다. 만성적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일본도 2013년 아베노믹스 이후 적극적 통화정책에 따라 물가상승률이 일부 반등했다.

하지만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2013년 이후 통화정책의 물가안정목표를 달성하는 데 연이어 실패했다. 2013~15년에는 목표보다 1.9%p(포인트) 낮은 1.1%, 2016~2018년에는 0.5%p 낮은 1.5%, 2019년 이후에는 1.6%p 낮은 0.4%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즉 한국의 낮은 물가상승률을 전세계적인 저물가 현상의 반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KDI는 이 같은 저물가 기조가 적절한 시기의 통화정책 운용으로 충분히 바로잡힐 수 있다고 바라봤다. 물가가 화폐 대비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인만큼 통화량 조절을 통해 장기적인 상승세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KDI는 비록 세계화, 기술경쟁, 인구구조 변화 등이 일어나더라도 이에 대응한 통화정책으로 장기적인 물가상승률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한국은행은 이 같은 통화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KDI는 그 이유로 한국은행법에 따른 구조적 제약을 꼽았다. 한은법 1조 1항 '물가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항과 2항 '금융안정에 유의해야 한다'는 조항이 상충한다는 것이다. KDI는 근원물가 상승률이 목표치를 밑돌고 경기가 둔화하던 지난해 11월 한은이 가계부채 급증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한 것을 물가안정에 역행한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정규철 연구위원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1년 도입한 금융안정 조항이 실제 운용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무게를 지니다보니 물가안정을 저해하는 상황까지 왔다"며 "통화정책이 금융안정을 추구하도록 명시한 법조항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 연구위원은 "지난해 부동산 규제 이후 가계부채 증가세가 축소된 경험도 있고, 자본유출입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외환건전성 규제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등 금융안정은 통화정책 외의 수단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금융안정은 통화정책보다는 거시건전성 규제 등 금융정책수단을 우선 검토하고, 통화정책은 물가안정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