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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밑바닥에서 밀어올린 무수한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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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11.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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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천융희 시인 ‘스윙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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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사사’로 등단한 천융희(1965~ ) 시인의 첫 시집 ‘스윙바이’는 아픈 세상 깊숙이 손을 내밀어 두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픈 것(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를 다 감당하지 못한 시인은 미안해하면서 함께 슬퍼한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관찰이다. 우연히 마주친 그들을 바라보던 시인은 “저들의 부흥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공터의 화분’)에 대해 고민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시를 쓰는 것이 부끄러워 문장을 비틀거나 “은유와 직유”(‘시인의 말’)를 동원한다.

시간의 뚜껑을 닫으면 여긴 숨어 있기 좋은 소행성이다

입술을 둥글게 오므린 블랙홀

절반은 깨어 있고 절반은 묻혀 있다
바람의 호흡을 거머쥐고 휘파람 소리를 낼 때까지

비튼 문장을 부리에 물고
낯선 감정이 날개에 촘촘히 박힐 때까지

좌우 수직으로 비행할 때까지

가까스로 완성된 이끼는 충돌의 틈에서 웃자란 질문이다

비스듬히 창을 열면 수면에 파문 지는 검은 하늘
얼비치는 별들은 문장의 좌표다

궤도를 따라 벽을 오르면
의문의 소리 그러니까,
밑바닥에서 밀어올린 무수한 울음이 있다

나는 두 개의 하늘 사이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간혹 휘파람 소리에
가녀린 깃털을 부비는 새 한 마리 둥글게 날아오른다

- ‘스윙바이 -우물’ 전문


먼저 여는 시 ‘스윙바이’를 살펴보자. 우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성장의 어느 시기 우물에 숨었던 기억을 형상화하고 있다. 왜 우물에 숨어야 했는지 구체적인 진술은 없지만 “창을 열면 수면에 파문 지는 검은 하늘”이나 “밑바닥에서 밀어 올린 무수한 울음”을 감안할 때 무언가 좋지 않은 일로부터의 도피라 짐작할 수 있다. 우물과 비슷한 닫힌 공간으로는 우체통, 서랍, 관, 수옥(水獄), 터널, 심해 등이 있다.

스윙바이란 무중력의 우주를 영구히 항진하기 위한 비행법이다. 시인은 “시간의 뚜껑을 닫”는 순간 우물을 “숨어 있기 좋은 소행성”으로 바꿔 집 밖 우주로의 탈출을 꿈꾼다. ‘숨어 있다’의 저편에는 ‘찾고 있다’는 명제가 성립하고, 블랙홀은 우물에 숨었을 당시의 의식상태나 영원한 도피를 상징한다. “절반은 깨어 있고 절반은 묻혀 있다”는 것은 물이 절반이 찬 우물의 상태이면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숨은 자’의 심리상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복합적으로 아우르는 문장이다.

“가까스로 완성된 이끼”는 우물에 숨은 시기가 유년기보다는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것을, 충돌이 아닌 “충돌의 틈”이라는 것은 물리적 충돌이 윗세대의 갈등이라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우물 속으로 도피해 ‘왜 싸울까?’,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웃자란 질문”을 던진다. 숨바꼭질이든 도피든 영원히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우물 밖으로 나와도 “나는 두 개의 하늘 사이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첫 행에서 ‘거기’가 아닌 ‘여기’라고 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말하자면 밤의 척추처럼
주상복합 아파트를 돌며 차츰 커지는 붉은 몸뚱어리

최저시급을 수거하는 그의 직무는
무분별하게 유출된 대형마트 카트를 운반하는 일이다

연결고리를 중심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어제와 오늘

수십 개 발이 일제히 바닥을 굴린다
어긋나게 놓인 보도블록 위
지네 한 마리 간다

밀어붙이는 힘에 따라 휘어지는
등뼈의 각도 그 쏠림이
코너를 돌 때마다 좌우로 요동치고

사내의 눈썹이 수심 가득
고층 외벽을 천천히 오르내린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심호흡이
어둠을 뚫고 흩어질 때
잠시 둥글어지는 사내의 무척추

하루의 전모가
달의 폐곡선 속으로 스캔 되는 순간이다

내일의 바코드는 내일의 분량

야삼경
매지구름 한 점이
달무리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 ‘달의 폐곡선’ 전문


시인이 관찰하는, 주된 시적 대상은 시장에서 폐지를 줍는 늙은 사내(‘칼새의 행로’), 공장에서 잘려 지하 점포 계단 아래에서 자는 늙수그레한 노숙인(‘공터의 화분’), 과일 실은 트럭을 몰고 다니며 파는 등 굽은 사내(‘태양의 뒤편’), 요양원에 미동조차 없이 누워 있는 노인(‘넝쿨의 힘’), 쓸모가 다해 길가에 내놓은 마네킹(‘마네킹의 법칙’), 거리에 날아다니는 검은 비닐봉지(‘파쿠르’) 등 소외된 이웃이거나 사람의 눈길에서 멀어진 사물들이다.

시 ‘달의 폐곡선’은 한밤에 최저시급을 받으며 “무분별하게 유출된 대형 마트의 카트”를 수거하는 사내가 대상이다. ‘투잡’할 것 같은 사내는 밤 12시가 지나도록 “주상복합 아파트를 돌며” 카트를 운반한다. 카트가 늘어날수록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어긋나게 놓인 보도블록 위”를 지날 때면 길게 연결되어 굴러가는 카트가 한 마리 지네 같다. “코너를 돌 때마다 좌우로 요동치”는 것은 카트지만 “사내의 눈썹”에 가득한 수심과 맞물리면서 고단한 사내의 삶으로 확장된다.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하나가 “달무리를 배회”한다. 사내의 삶에도 비가 올 것 같다.

양파 한 조각 입술에 물고 멀찍이 양파를 까다,
알겠다
갈 때까지 가보지 않아도 진작 알겠다

삶, 때론 물컹해 보여서

열 손톱 세워 한 겹 또 한 겹 벗겨 낼 때마다
한 생이 통째 눈물 나도록 맵고 아린 것을
궤적이 온통 자줏빛으로 물드는 것을

도마 위 붉은 양파 하나
칼을 지나자 화악 길이 파문 진다

붉은 양파는 붉어서
가둔 슬픔이 치밀한 형식을 갖추고
겹 가장자리마다 붉게 매달린 궤도의 단면

짓무른 눈가 훔치다 보면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절망의 물길이
곳곳에 은폐되어 있다는 걸

겉껍질에 싸인 헐거운 저녁 아래
궤도 이탈을 빙자한 사람들의 발길이 분분하다

과감하게 또는
가감 없이 내딛는 또 다른 한쪽 발

- ‘붉은 양파는 붉다’ 전문


표제시 ‘낙엽’의 노인 요양 병동에는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바싹 마른 여자가 누워 있다. (시인의 노모일 수도 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여자(‘기억의 내부’)는 “한 번도 불태워 보지 못한 生의 뒤끝”까지 밀려나 있다. “밀봉되어 있”는 생(生)의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진작 알” 것 같다. “한 생이 통째 눈물 나도록 맵고 아”리다.

양파를 한 겹 한 겹 벗겨낼 때마다 “자줏빛으로 물”들고, 양파를 자를 때 칼의 길에 생긴 ‘파문’은 시인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웅변한다. 측은지심으로 소외된 것(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내 삶이 벼랑 위에 섰을 때마다 속으로 울거나 혼자 견뎠을 것이다. 그런 모습조차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지만 “궤도 이탈을 빙자”해 이제는 과감하게 살 때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삶, 때론 물컹해 보여서” 좋긴 하지만 새로운 삶(시)의 단단함을 위하여 “또 다른 한쪽 발”을 세상에 내밀어야 할 때다. 스윙바이, 오래된 뚜껑을 열고 둥글게 날아오르는.

◇스윙바이=천융희/한국문연/144쪽/1만원.


[시인의 집] 밑바닥에서 밀어올린 무수한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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