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스라엘 정착촌 인정…41년만에 입장바꿨다

15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자치령 서안지구 도시 헤브론의 이스라엘 정착촌에 들어선 이스라엘군(오른쪽)과 이에 항의하는 팔레스타인인/사진=AFP

미국이 팔레스타인 자치령에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으로 또 한번 이스라엘 편에 서면서, 역내 갈등이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착촌의 국제법 위반을 지적했던 1978년 당시 미국 국무부의 발표를 41년만에 뒤집는 것이다.


18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이 팔레스타인 자치령 요르단강 서안지구(웨스트 뱅크)에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발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법적 논쟁의 모든 측면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 행정부는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민간 정착촌 정착 그 자체는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요르단강 서안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이지만,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뒤 점령한 곳이다. 이스라엘은 유엔 등 국제사회 반대에도 서안지구 정착촌을 늘렸다. 현재 이 지역엔 유대인 60만 명이 140여 개 정착촌을 이루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자치령에 대한 침해라며 반발한다.

미국은 지금껏 1978년 국무부가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립하는 건 국제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법률적 의견에 기반해 외교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지역 평화를 위한 이스라엘 정착촌 확대 저지에 동의했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자치령을 구분하는 ‘2국가 체제’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이 역내 평화를 진전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CNN은 이날 발표로서 행정부가 41년 만에 외교적 판단을 뒤집었다고 설명했다.

11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자치령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에서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군이 충돌한 가운데 가이포크스 마스크를 쓴 팔레스타인인이 걸어가고 있다/사진=AFP

팔레스타인은 즉각 반발했다. 도이치벨레(DW)에 따르면 나빌 아부 르데네 팔레스타인 대통령 대변인은 “미국의 입장 전환은 국제법과 완전히 모순된다"고 비난했다. 또 미국이 국제법에 따른 판단을 취소할 권한이나 자격이 없고, 미국이 이스라엘 정착촌에 합법성을 부여할 권리도 없다고 지적했다.

역내 이스라엘 영향력 강화를 경계하는 중동 국가들도 비판에 가세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이만 사파티 요르단 외무장관도 트위터에 “미국의 태도 변화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정치권 내부와 유럽연합(EU)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판단은 국제법을 위반할 뿐만 아니라 평화 달성을 방해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고립시키고 극단주의로 넘어가 외교를 약화한다”고 맹비난했다. 또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정책국장은 이날 “팔레트사인 자치령의 이스라엘 정착 정책에 대한 EU의 입장은 분명하고 변함 없다”며 “트럼프 정부의 입장은 ‘2국가 체제’ 해법을 통한 지속적 평화 전망을 해친다”고 지적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환영했다. 폼페이오 장관 발표 직후,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의 진실과 정의를 뒷받침하는 확고한 입장에 감사한다“며 ”평화 진전을 원하는 다른 나라들도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의 판단 변화는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네타냐후에게 힘을 실어줄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9월 총선에서 네타냐후 총리의 정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총리 연임도 불투명해지는 등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던 상황에, 미국 발표가 일종의 ‘선물’이란 의미다.

9월 10일(현지시간)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 자치령 이스라엘 정착촌 합병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사진=AFP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4월부터 “서안지구 내 정착촌도 이스라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합병’ 의지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바바라 플렛어셔 BBC 중동전문가는 “유대인 정착촌의 국제법적 금지를 풀어버리면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 의지를 더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이번 결정이 ‘2국가 체제’ 해법의 실현 가능성을 없앴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지난해 텔아비브에 있던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공식 이전했다. 또 올 3월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1981년 골란고원 합병을 인정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는 포고문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