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속보
통합검색

김희애, 우아를 넘어 존엄으로

  • 김소미 (‘씨네21’ 기자) ize 기자
  • 2019.11.20 08:45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 문자
  • 글자크기조절
  • 댓글···
image
조금은 무례한 일반화를 해 보자. 한국에서 김희애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한 번도 김희애의 연기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데뷔 36년 차 톱 배우. 텔레비전을 브라운관으로 칭하던 시절부터 김희애는 김희애였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배우 김희애는 신작 ‘윤희에게’에서 대단한 꾸밈 없이도 불쑥 낯선 얼굴을 전하고 있다. 남편과 이혼 후에 고등학생 딸 새봄(김소혜)과 사는 윤희에겐 이루지 못한 인연과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일본 오타루에서 첫사랑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온다. 어쩌면 엄마의 젊은 시절을 닮았을 새봄은, 그 편지를 먼저 읽은 뒤 짐짓 무심하게 엄마를 오타루 여행으로 이끈다. 한국에서 홀로 2인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40대 여성의 삶에 로맨스가 끼어들 일은 많지 않다. 성 소수자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윤희에게’는 이성애 중심 사회와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된 여성의 삶을 한 겹 얇은 장막 너머에서 점잖게 응시하고 있다. 자기를 웅변하지 않는 인물일수록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몫도 덩달아 커지기 마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을 택하곤 했을 윤희는 심지어 대사도 많지 않다. 다행히 김희애는 고전적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것 같다. 한 여자의 마음이 불현듯 녹아내리는 과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모녀가 설원을 걷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발밑의 철로는, 상황의 외피가 여러번 교체될 동안에도 배우가 든든히 지켜낸 감정의 뼈대처럼 느껴진다.

자기 목소리를 잃은 여자의 침묵과 그것을 되찾으려는 여자의 설레임. 이 모순된 감각은 겨울과 봄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처럼 이상야릇하고, 뜨겁게 출렁이면서도 절대 넘치지 않는다. 이 균형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쯤에서 질문을 한 가지 더 보탠다. 김희애는 왜 배우, 그리고 스타로서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나. 잘 알려진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을 포함해, 김희애에겐 자기 심지를 단단히 지키려는 사람의 아우라가 있다. 드물게 돋보이는 그의 우아함은 스타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다. 하지만 종종 배우에게 우아하다는 말은 자칫 너무 아름다운 수식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우아함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흐트러진 모습이 마치 더 진실한 무언가라도 되는 양 멜로드라마의 장치로 활용될 정도(‘밀회’)였으니 말이다. ‘윤희에게’의 김희애가 관객의 예상을 살짝 비껴가는 지점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김희애의 우아함은 윤희를 만나 존엄함의 감각으로 확장된다. 윤희의 침묵과 절제는 결코 제스쳐가 아니다. 유예된 사랑을 마음에 품고 평생 삶의 무게를 곱씹은 사람에게서 맡을 수 있는 결연한 냄새에 가깝다. 요컨대 김희애의 윤희는 아파하되 그것에 골몰하지 않고, 외롭고 쓸쓸하되 결코 자신의 삶을 누추하게 방기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배우가 차곡차곡 쌓아온 기운과 깊은 캐릭터가 만나 서로를 더 반짝이게 비추는 광경은 관객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김희애는 “나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본래 좀 더 무뚝뚝한 사람같다”(‘씨네21’)고 했다. 여기서 무뚝뚝하다는 말은 여성 배우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호감을 거스르지 않는 어떤 태도와 비교하면서 일컬은 말처럼 들린다. 그는 “일할 때는 애티튜드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프로다운 대답으로 마무리지었다. 위안부 재판을 주도하는 부산 출신의 여행사 사장 문정숙이 등장하는 ‘허스토리’가 그런 김희애에게서 대장부의 기질을 봤다면,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거쳐 더욱 세심하고 확장된 여성 서사를 보여주는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는 김희애의 대범함, 냉철함, 현명함과 같은 특질을 또렷이 끄집어낸다. “배우는 여러 직업 중 하나일 뿐. 연기를 할 때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진심과 스킬의 균형이 중요한 것 같다”라는 김희애는 “여러 버전의 윤희를 준비했고 그 중 하나를 택했다.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지만 지금의 결과에도 감사한다”(‘씨네21’)라고 덤덤히 말했었다. 나는 거기서도 윤희를 봤다. 저벅저벅, 조급함 같은 것 없이 자기 보폭을 유지하는 지금의 김희애가 윤희만의 걸음걸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하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인 ‘윤희에게’가 우리에게 ‘혹시 내게도 놓쳐 버린 사랑이 있었던가’ 질문하게 만든다면, 그 힘은 배우 김희애의 조용한 내공과 진화를 빼놓고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김희애는 여전히 새롭고, 힘이 세다.



머니투데이 주요뉴스

전기차로 돌아선 美거인 GM…LG 배터리 선택했다

베스트클릭

오늘의 꿀팁

  • 날씨
  • 내일 뭐입지

많이 본 뉴스

KB x MT 부동산 설문조사
머니투데이 초성퀴즈

포토 /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