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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홍콩대…86년 건대, 68년 도쿄대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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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은 기자
  • 2019.11.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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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식 고취에 기여했던 68년 일본의 도쿄대 투쟁, 86년 건국대 사건…"홍콩이공대 시위는 더 큰 영향 미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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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홍콩 이공대에서 탈출을 시도한 시위 참여 학생이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2019.11.20/뉴스1
반정부 시위가 200일을 넘긴 가운데 시위대의 '최후 보루' 홍콩이공대(폴리테크닉)에 있는 시위대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며 홍콩 시위가 힘을 잃고 있다. 이를 두고 홍콩 내외부에선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투쟁이 사그라들었다며 회의적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당장의 승리 여부를 떠나 홍콩이공대의 투쟁이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는 시각도 있다. 과거 일본의 도쿄대 투쟁, 한국의 건국대 사건 등에서 보 듯 이미 홍콩 민주주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한 발 더 나아가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관점에서다.



시위대의 마지막 보루, 홍콩 이공대


홍콩 반정부 시위(홍콩 민주화 운동)는 지난 6월9일 시작됐다. 시위는 홍콩 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이고 모이며 규모가 커졌다. 홍콩인들은 이 법안이 반중국 인사, 인권 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보내는 데 악용돼 홍콩 민주주의와 법치를 무너뜨리고 독립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시위에 나섰다.

시위가 격화되며 지난 6월16일에는 주최 측 추산 약 200만명이 참가해 홍콩 인구의 1/4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홍콩 당국은 인권과 절차적 보호 등은 유지되며 탈세 등 9가지 범죄는 이 법안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 분노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홍콩 정부는 지난 9월 시위대의 '범죄인 인도 법안 완전 폐지' 요구를 수용했지만, 시민들은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적 조사, 행정장관 직선제 시행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지속했다.

18일 오후 홍콩 이공대학교에서 경찰이 시위 학생을 연행하고 있다. 2019.11.18/뉴스1
18일 오후 홍콩 이공대학교에서 경찰이 시위 학생을 연행하고 있다. 2019.11.18/뉴스1

11월 들어서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홍콩 경찰이 시위대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을 공식화했다. 그러자 지난 8일 홍콩과기대 2학년 차우즈록이 숨지는 등 사망자와 중상자가 잇따랐고, 이에 분노해 시위대의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이 과정 홍콩이공대에 중, 고, 대학생 시위대들이 몰려들었다. 시위대 수백명은 이곳을 거점이자, 일종의 마지막 보루로 삼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미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던 홍콩 경찰은 지난 17일부터 시위대를 '봉쇄'했다.

일종의 '고사 작전'을 편 것인데, 이 과정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일부 시위대는 바깥에서 대기 중인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고, 정문 반대편 고속도로로 밧줄을 타고 도망쳤으며, 하수도 탈출 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19일까지 약 600명이 홍콩이공대를 나오거나 체포됐다.

20일 기준 AP통신은 홍콩이공대 교정에 남아있는 시위대가 100명 정도라고 보도했고, SCMP는 홍콩이공대 교정에 남아있는 시위대가 60~100명 정도라고 추산했다. 데렉 류 학생회장도 체포됐다. 이때부터 홍콩이공대 시위대의 동력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68년 '도쿄대 투쟁'→86년 '건국대 사건'→19년 '홍콩 이공대 농성'


사실 홍콩에서 뒤늦게 민주주의에 불이 붙었을 뿐, 이전 아시아 국가들에선 차례로 민주주의 시위가 벌어져왔다. 각 국가에선 대학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는데, 홍콩의 '홍콩 이공대 농성'처럼 1968년 일본에선 '도쿄대 투쟁'(東大闘争)이, 1986년 한국에선 '건국대 사건'이 발생했다. 앞선 두 투쟁도 경찰과 시위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를 무대로 격렬 대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위대들은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요구하며 정부와 경찰에 대항했다.

시위의 시작이나 양상, 결과는 조금씩 달랐다. '도쿄대 투쟁'은 전공투(全共闘,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로 불리는 학생 단체가 주도했다. 이들은 1968년 5월 니혼대학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뒤 6월 도쿄대를 무대로 본격 활동에 나섰다.


1986년 10월 28일 건대항쟁 당시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건국대 교내 민주광장에서 애학투련 결성식 집회를 연 모습. (건국대 제공) /뉴스1
1986년 10월 28일 건대항쟁 당시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건국대 교내 민주광장에서 애학투련 결성식 집회를 연 모습. (건국대 제공) /뉴스1

이들은 처음 도쿄대의 상징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외부와의 접근을 차단한 채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들은 초기에 도쿄대 의학부 학생이 인턴 제도를 대신하는 등록제에 분노해 시위하다가 점차 '평화의 허구성',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대학 해체, 민주주의 등을 주장했다. 이들의 점거는 도쿄대가 1969년 신입생 모집을 실패하는 등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지만, 경찰이 헬리콥터를 동원하고 최루탄을 쏘는 등 강경 진압하며 서서히 진화돼갔다.

일본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진=위키커먼스
일본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진=위키커먼스

'건국대 사건' 역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위였다. 1986년 10월,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명은 건국대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전두환 독재 정권'을 규탄하는 동시에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했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공산분자'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탄압했다. 이들은 4일 동안 경찰과 대치하다가 결국 대학생 1520명이 연행, 이 중 1290명이 구속되면서 종지부가 났다.

두 시위는 모두 각 국가의 민주주의 의식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도쿄대 투쟁' 이후 전공투가 학교를 점거해 민주주의 등을 주장하는 시위 방식은 일종의 유행이 됐고, '건국대 사건'은 '대중의 의식에 부합하는 투쟁을 하자'는 반성이 나오면서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도쿄대 투쟁'은 전위조직 중심이었고, '건국대 사건'은 대중운동 방식이었다. 특히 '건국대 사건'은 1987년 민주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홍콩 이공대 농성'과 많이 닮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건국대 사건'은 마치 '홍콩 이공대 농성'처럼 강경진압으로 학생들을 잡아갔지만, 5공 붕괴의 결정적 시작이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운동으로 질적인 발전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단 뜻이다"라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홍콩 이공대 농성'을 통해 홍콩에도 민주주의의 신새벽이 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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