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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의 아포리아]‘건설적 모호성’과 지도자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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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2019.11.28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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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ἄ)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ς)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서 등장하는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건설적 모호성’(constructive ambiguity)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신·구교도 사이의 폭력적인 갈등으로 3000여명이 희생된 불행한 역사를 끝맺은 1998년의 성금요일협정은 제7조에서 무장해제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이 조항은 구체적인 제도화 형식이나 운영 방식을 설명하는 다른 조항들과 비교할 때 의외로 간단하다.
 
7조는 모든 관련 당사자는 무장해제가 협상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서로 노력하며 국제위원회의 감시 아래 2년 안에 완전한 무장해제를 이룬다고 짧게 언급했다. 이러한 모습으로 7조가 써진 데 대해 아직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어려운 사안을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수준에서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협상참여를 쉽게 만드는 ‘건설적 모호성’을 보인다고 평가한다.
 
실제 구교도 계열인 아일랜드공화국군의 무장해제는 1998년 협정이 체결되고 한참 후인 2001년 시작되어 2005년 완결되었다. 신교도 계열의 무장해제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려 얼스터민병대는 2009년, 얼스터방위연합은 2010년 무장해제를 완료했다. 그러니까 협정 이후 12년 만에 끝난 무장해제를 협정의 우선조건으로 제시했더라면 1998년의 역사적 협정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건설적 모호성’이 넓혀놓은 공간에선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커진다.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1998년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장단체 수감자가 석방되기 전 아일랜드공화국군의 무장해제가 이뤄질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물론 무장단체 수감자가 석방되고도 한참 동안 무장해제는 이뤄지지 않았고 블레어의 당시 결과적인 거짓 호소는 도덕적으로 잘못됐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는 당연히 비밀채널도 존재했다. 북아일랜드 공화주의자와 영국 정부의 비밀채널은 1993년 옵서버가 보도하고 2008년 브렌든 더디가 골웨이대학에 문서를 기증하면서 밝혀졌다. 대화 시도를 곧 배신으로 여긴 분쟁의 시대에 그리고 갈등이 격화해 비관적 전망이 압도적일 때 비밀채널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화를 시도한 정치 지도자들의 노력은 평화 프로세스의 성공에서 지도자의 판단과 용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정치 지도자는 평화 프로세스가 가져올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상황이 통제되고 있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또한 갈등의 시대를 더이상 긍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평화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기존 입장을 바꿔야 하는 이중적 상황이 불가피할 때 시민들을 설득해 평화협정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야 하고 집단정서와 신념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정체성 형성을 지지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그의 책 ‘방법서설’에서 “문제가 복잡하면 나누라”고 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미완으로 남겨둔 채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낼 미래세대의 지혜에 맡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모범답안을 찾을 수 없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는 변명은 의외로 반정치적이고 반역사적인 태도다. ‘건설적 모호성’이나 미래세대의 지혜는 평화를 위한 남북관계나 역사와의 화해를 위한 한일관계에서 정치 지도자가 꼭 고려해야 할 개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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