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이콧 탓…WTO 상소기구 '기능마비' 위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캐리커쳐./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다자간 자유무역체제 상징'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 출범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국이 분쟁해결기구(DSB)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 위원 선임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위원 2명의 임기가 끝나는 오는 10일이 지나면 WTO 분쟁해결 기능은 사실상 마비된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잦은 통상 마찰을 경험하는 한국으로선 중요한 대응 수단을 잃게 됐다.


8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오는 10일 토머스 그레이엄(미국), 우잘 싱 바티아(인도) WTO 상소위원의 임기가 만료된다. 이로써 오는 11일부터 상소위원은 자오훙(중국) 위원 1명 만이 남게 된다.

상소기구는 WTO 분쟁의 최종심(2심)을 진행하는 '대법원' 역할을 한다. 분쟁 당사국이 1심 패널 결정에 불복해 상소를 제기하면 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린다. 상소기구는 총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위원 3명이 재판관이 돼 1건을 심리하는 구조다. 두 위원의 임기가 종료되면 재판부 구성 자체가 불가능해지므로 상소기구는 식물상태로 전락한다.

WTO 분쟁해결 절차도./그래픽=이승현 디자인기자

상소기구가 무력화될 위기에 처한 것은 미국의 '보이콧' 때문이다. 자국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다는 이유로 상소기구에 반감을 드러낸 미국은 임기를 마친 위원 후임 선출에 반대해 왔다. WTO는 만장일치제를 택하고 있어 상소위원을 선임하려면 164개 회원국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선출할 수 없다.

결국 WTO 분쟁해결 절차에는 심각한 '법적 공백'이 발생하게 됐다. 1심 패널 판정 이후 패소국이 상소를 제기하더라도 재판관이 없어 2심 진행이 안된다. 사건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영구미제'로 남는 셈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WTO 법에 정해둔 2심 재판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전세계 모든 나라가 법적 불안정성에 노출되게 됐다"며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모두가 노력해도 미국의 반대를 이겨낼 수 없어 상소기구 기능이 정지하게 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모나카에 있는 셸 석유화학단지를 방문해 연설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WTO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진=AFP=뉴스1

회원국들은 이를 막기 위해 WTO 기능 복원을 위한 구조개혁 노력을 이어 왔다. 소그룹 통상장관회의에서 한국·일본·EU·호주·멕시코 등 13개국 대표는 상소위원 공석 문제를 논의해 왔다. EU는 지난해말 11개 회원국과 함께 상소 기구 개혁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미국이 거부하면서 개혁은 물거품이 됐다.

당장 기능정지를 앞두고도 회원국들은 상소기구 문제를 두고 수시로 만나 논의했지만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현재 상소기구에 계류된 13건 중 심리 절차를 마친 3건은 임기가 끝나도 계속 처리하도록 하거나 나머지 10건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을 논의 중이지만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은 WTO 상소기구 문제에 손 놓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처지다. 주요국의 거세진 보호무역주의 공세에 맞서려면 WTO의 정상화는 중요하다. 한국은 강대국의 통상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WTO 분쟁해결절차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한국산 철강·변압기에 대한 고율 덤핑·상계관세 부과는 물론 최근 일본 수출규제 건도 WTO에 제소한 상태다.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의 경우 1심에서 패소한 뒤 상소심에서 이를 뒤집고 승소한 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상소기구 무력화를 밀어부치는 만큼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며 앞으로 대외 통상환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다른 나라와 통상 분쟁을 많이 겪는 한국은 상소기구 기능이 중단되면 믿을 만한 대응 수단을 잃게된다"며 "현재로선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고, 소송으로 가기 전 사전에 문제를 예방하고 피해가는 게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