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이 지금 '100억 투자' 받았다면 어떻게 성공했을까

윤필구 빅베이슨캐피탈 대표. /사진=머니투데이DB

"허생전은 리얼리티 넘치는 벤처 소설이죠."

조선 후기 무능한 양반을 풍자하고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을 벤처 업계에 비유한 글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벤처 허생전'은 시대적 배경과 등장 소품만 달라졌을 뿐 줄거리는 원작과 거의 같다. 이 글의 허생은 글을 읽는 대신 비즈니스 모델을 공부하고, 과일을 사재기하는 대신 판교의 엔지니어를 모두 영입해 큰 성공을 거둔다.


글의 재미는 2019년의 시대상을 기존의 허생전에서 깨알같이 찾을 수 있는 데서 나온다. 예를 들어 2019년 허생은 유행 지난 롱패딩을 입고 액정 깨진 아이폰5를 쓴다는 이유로 주위의 비웃음을 산다. 강남 최고 부자인 손씨에게 투자금 100억원을 받을 땐 카카오뱅크를 이용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갈 땐 타다를 부른다.

미국 홈리스에게는 우버 드라이버 일을 권하고, 사업에 성공한 이후에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에어팟 프로를 착용하는 모습도 나온다.

글쓴이는 실리콘밸리에서 초기 단계 스타트업 투자업을 하는 윤필구 빅베이슨캐피탈 대표다. 윤 대표는 지난 13일 머니투데이와 전화 인터뷰에서 "몇 년 전 허생전을 처음 봤을 때 경제적 문제로 고민하다 투자를 받고, 사업에 성공해 해외로 진출하는 모습이 벤처 업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주말에 할 일이 없어 몇 시간 만에 썼는데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 당황스럽다"고 밝혔다.


윤 대표가 개인 블로그에 지난 8일 작성한 이 글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조회 수 5만회를 넘겼고 여러 커뮤니티로도 퍼졌다. 7825자로 200자 원고지 기준 40매, 한글 문서로 약 9장 분량이다. 이 글을 읽은 누리꾼들은 "기발하다", "허생전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글에 단순히 웃음만 담은 것은 아니다. 허생이 1급 공무원인 청와대 창업지원실 김 실장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장면에서는 창업이 규제로 가로 막힌 현실을 신랄하게 비꼰다.

허생이 "이제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 청년 창업을 육성한다면서 있는 규제들도 과감히 철폐해야 하는 판국에 없는 규제까지 만들면서 유니콘 (기업)을 기대한단 말이냐"고 일갈하는 장면에 독자들은 큰 호응을 보냈다.

윤 대표는 이 글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윤 대표는 "대단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 아니라 재미로 쓴 글인데 혹시 오해가 생길까 걱정"이라며 "우리나라가 규제가 강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맞지만 요즘에는 창업 환경이 많이 활성화되면서 좋은 점도 많다"고 했다.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인 윤 대표는 그동안 스타트업이나 벤처 투자에 관련한 글은 많이 올렸지만 소설을 쓴 것은 처음이다. 윤 대표는 "저는 공대 출신이고 투자하는 사람일 뿐"이라며 "주변에서 연재 요청도 하는데 당분간 더 글을 쓸 생각은 없다"고 웃었다.

윤 대표가 소속된 벡베이슨 캐피탈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국내 벤처캐피탈(VC)다. 윤 대표는 미국과 한국을 수시로 오가면서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하고 있다. 주된 투자분야는 모바일, 전자상거래, 기업용 소프트웨어, 디지털콘텐츠, 에듀테크, 게임 등이다.

윤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와튼스쿨 MBA(경영대학원)에 다니면서 투자심사역으로 변신했다. 2008년 인텔캐피탈과 월든인터내셔널에서 실리콘밸리의 투자방법을 익혔다. 2010년 모바일게임 '애니팡'으로 주목을 받은 선데이토즈에 초기 투자하면서 한국 시장에도 관심을 이어오고 있다.

허생전은 집필 당시인 1700년대 후반 보다 약 1세기 앞선, 17세기 조선 효종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박지원은 허생과 실존 인물인 이완과의 대화를 통해 허례허식에 물들어 있고 보수적인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실용적인 사고를 촉구했다. 허생전은 주제와 전개가 명료하고, 풍자를 목적으로 한 만큼 '재수생전'(재수생+허생전) '공생전'(공대생+허생전) 등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