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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나섰다[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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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형도 기자
  • 2019.12.1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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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잃어버린 세월, 길게는 40년…짐작도 못했던 실종 아동 부모의 삶, 홀로 싸우고 있었다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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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를 찾아주세요" 28년 전 딸 정유리양을 잃어버린 정씨가 만든 전단지. 이걸 들고 향한 곳은 지하철이었다. 한 명에게라도, 더 멀리 전하고 싶어서./사진=남형도 기자
28년 전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나섰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전단지 한 뭉치를 들고 지하철을 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한 편이었다. 통로는 시원스레 나 있고, 양옆 좌석은 빼곡히 차 있는 정도. 잠깐 서서, 오른손으로 꼭 잡은 전단지를 바라봤다. 주황색 바탕에 눈에 잘 띄는 노란 글씨, 거기엔 '우리 아이를 찾아주세요'라 쓰여 있었다.

이름은 정유리, 잃어버린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왼쪽 사진엔 해맑게 웃는 아이가, 오른쪽 사진엔 무표정한 어른이 있었다. 3cm 남짓한 두 사진 사이엔, 28년이란 기나긴 시간이 있었다. 아이를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전단지를 내밀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어폰을 꽂고 있어 다가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애써 승객들에게 전단지를 보였다. 그리고 힘을 줘서 말했다. "아이를 찾고 있어요. 한 번만 꼭 봐주세요." 몇몇은 받아들었고, 몇몇은 보지도 않았다. 또 다른 몇몇은 손사래를 치며 인상을 썼다, 몹시 귀찮다는 듯이. 야속할 시간도 없었다. 한 장이라도 더 돌려야 했으니까.

지하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전단지를 다시 바라봤다.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사진 속 아이는.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하기 힘든, 그렇지만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아이, 흔히 '실종 아동'이라 부르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본 적이 없어서, 깊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가 경험한 건 아예 하늘나라로 떠났거나, 아니면 곁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 중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마주친 전단지도 유심히 보지 않았다. '많이 애타겠구나', 그 정도 생각하고 스쳐 갔던 것 같다.

우연히 알게 됐다. 그 기분이 '지옥'일 수 있겠단 걸.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알카사르 궁전. 여기서 아내를 잃어버렸었다. 잠깐이지만, 온몸을 짓누른 절박한 마음 때문에 잠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중한 이가 사라지는 기분을./사진=남형도 기자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알카사르 궁전. 여기서 아내를 잃어버렸었다. 잠깐이지만, 온몸을 짓누른 절박한 마음 때문에 잠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중한 이가 사라지는 기분을./사진=남형도 기자

지난해 스페인 세비야에 여행 갔을 때였다. 알카사르 궁전을 보러 갔다. 다 본 뒤 출구를 찾으려 했는데, 몇 바퀴씩 돌며 헤맸다. 아내와 나는 예민해졌고, 조금 말다툼을 했고, 한 발짝 정도 떨어져 다녔다. 스마트폰 지도에 고개를 박은 채 출구를 찾는데 아내가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몇 초 정도 눈을 뗐을까,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스마트폰도, 지갑도, 다 내가 갖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그 생각 하나에 눈앞이 컴컴해졌다.

아내를 미친 듯이 부르며 궁전을 뛰어다녔다. 궁전을 아무리 찾아다녀도 안 보였다. 사진 찍으며 웃는 사람들 얼굴에 멀미가 났다. 식은땀과 뜨거운 땀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안내 직원에게 방송을 해달라 했더니, "안 된다"며 거절했다. 그는 오히려 "시끄럽게 외치고 다니지 말라"며 내게 뭐라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어줄 정신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외치며 뛰어다녔다.

다행히 아내를 만났다. 처음 잃어버린 장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실상은 걱정인데, 나도 모르게 "어디 갔었냐"고 벌컥 화를 냈다. 그래서 또 싸웠다. 그 와중에도 속으론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찾아서 다행이라고,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곁에 있기만 하면.
배우 이영애씨가 실종된 아들을 찾아나서는 영화 '나를 찾아줘'.
배우 이영애씨가 실종된 아들을 찾아나서는 영화 '나를 찾아줘'.

2주 전 주말, 이영애씨가 나오는 영화 '나를 찾아줘'를 보고 오래 잊고 지냈던, 그때 생각이 다시 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들을 잃고 사는 애달픈 마음이 느껴져 먹먹했다. 더 이상 외면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실제 아이가 실종된 가족을 만나보기로 했다. 실종아동전문기관 도움을 받아, 오래전 아이를 잃은 세 가족을 소개받았다. 이야길 듣고, 아이를 찾아 다녀보기로 했다.



손 씻고 온다던, 용래가 없어졌다



김용래군(왼쪽)의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김용래군(왼쪽)의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로 갔다.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나니, 문이 덜컥 열렸다. "초행길이라 힘들지, 어서와요"라며 반기는 이가 보였다. 39년 전에 아들 김용래군(당시 만 7세, 현재 만 46세)을 잃어버린 고영자씨였다.

컴컴한 집안에 살림은 조촐했다. "커피 드릴까?"하더니 고씨가 믹스커피 한 잔을 내왔다. 달짝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다. 오래된 아픈 얘길 다시 꺼내게 하는 게 죄송해서, 어떻게 말을 꺼낼까 생각했다. 찾아온 취지를 살짝 얘기했더니, 그가 자연스레 얘길 시작했다.

김군은 참 똑똑했단다. 그리고 활발했다. 과일을 좋아했다. 어렴풋한 기억 속 그는 엄마가 복숭아를 먹으면, "복숭아 냄새가 나네. 나도 먹고 싶어"하며 얘기하는 아이였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짙었다. 어디 멀리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엄마 치마폭에 싸여 졸졸 따라다녔다. 집은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이었다. 숭곡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집과 담벼락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웠다. 학교 가깝게 다니라고, 부모 마음이 그랬다.

1980년 7월25일 금요일, 김군은 사라졌다. 김군과 연년생인 누나, 그의 할머니, 친삼촌 등 8명이 함께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 유원지에 놀러 갔을 때였다. 고씨는 하루 뒤인 토요일에 반찬을 싸들고 가기로 돼 있었다. 서울에서 살던 터라 김군은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떠 있었단다. 그게 고씨가 기억하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밥 먹게 손 씻고 오라"고 했고, 김군은 그러겠다며 뛰어갔다. 그리고 자취를 감췄다. 집에 있던 엄마는, 밑반찬을 준비하다 "용래가 없어졌다고?"란 얘길 들었다. 직행 버스를 타고 단걸음에 한탄강으로 갔다. 15일 동안 끼니도 거른 채 김군을 찾아다녔다. 나쁜 생각이 들었다. 잠수부 2명을 데리고 강도 뒤지고, 군인들과 옥수수밭도 파헤쳤다. 고씨는 "왜 보냈나, 내가 왜 보냈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고 회상했다. 엄마는 절대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는다면서, 절대 혼자 안 보냈을 거라면서.



그리고 39년, '두통약' 없인 살 수 없었다


김용래씨 어머니 고영자씨. 교통사고로 숨진 민식이 얘기를 하며 눈물지었다./사진=남형도 기자
김용래씨 어머니 고영자씨. 교통사고로 숨진 민식이 얘기를 하며 눈물지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삶이 무너져갔다. 모든 게 '김군 찾기'에 집중됐다. 신문에 현상금을 걸어 광고하고, 전단지를 뿌렸다. 앳된 아들 사진을 담았다. 모르는 이도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 특징도 적었다. 김군은 콧등에 마마 자국이 있었다. 고씨는 "마마 자국은 안 없어지기 때문에, 아마 지금도 남아있을 것"이라며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집안에선 김군의 이름을 꺼내지도 못했다. 서로에게 상처였고, 고씨에겐 더 그랬다. 혹시 돌아올까 싶어, 7년 동안 이사도 못 갔다. 그럼에도 김군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잃어버린 지 얼마 안 돼 "엄마, 엄마"하는 전화 한 통이 왔다. 일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김군이 아녔다. 그 뒤에도 아들인 것 같아 DNA 검사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몸도 마음도 곪아갔다. 김군 생각에 몇 년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고씨는 "지난해 1월까진 두통약 없인 못 살았다"고 토로했다. 구역질이 나도, 그걸 안 먹으면 무기력하고 두통이 찾아와 생활하지 못했다. 몸이 다 망가졌다. 남편은 5년 전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 잃은 부모 마음은 절대 모를 것"이라며,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가 처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앙을 가졌고, 그에 기대 하루하루를 버텼다.

김군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김군 누나가 거의 다 가져갔는데, 몇 장은 다시 찾아왔단다. 고씨는 "용래 사진을 몇 달 전에 봤는데 어디 갔는지, 이렇게 정신이 없다"며 분주히 찾았다. 그는 방에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와선 "못 찾겠다"고 했다. 말만 그렇고, 서랍 여기저길 계속 뒤졌다. 그를 보며, 같은 마음이었다. 차마 사진도 못 찾진 않기를.

잠시 뒤, 고씨가 TV 아래 서랍에서 김군 사진 두 장을 찾았다.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여기 있어." 그는 그렇게 세 번씩이나 얘기했다. 사진 속 김군은 꽃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하나는 김군 누나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그리도 다른 하나는 김군 입학식 때라고 했다. 김군 뒤로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사진 테두리는 동그랗게 오려져 있었다. 귀중히 간직한 사진인 게 느껴졌다. 고씨는 "속상하니까 보다가도 안 보고 그런다"고 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민식이' 얘기를 하며 고씨는 끝내 울먹였다. 요즘은 예전처럼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아닌데, 어떡하냐고, 참 안타깝다고. 똑같이 아이를 잃었기에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애달픈 엄마 마음이었다.



새우볶음 쥐고 나가 사라진 '하늘이'


실종된 딸 조하늘양을 찾고 있는, 조병세씨./사진=남형도 기자
실종된 딸 조하늘양을 찾고 있는, 조병세씨./사진=남형도 기자

해가 어둑어둑해질 저녁 무렵, 경기도 용인시에 도착했다. '하늘이 아빠', 조병세씨를 만나러 왔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좀 남아,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그의 집 근처엔 초등학교 하나가 있었다. 운동장서 뛰노는 아이들이 새삼 다시 보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다, 추위도 잊고 잠시 멍해졌다.

집 앞에서 기다리다, 퇴근하는 그를 만났다. 짧은 인사를 나눴다. 조씨의 표정이 차가운 저녁 공기처럼 무거웠다. 일을 끝낸 고단함과는 다른 무언가 있었다. 묵묵히 그의 발길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이 어머니와도 가볍게 인사했다. 집안을 빙 둘러봤다. 흔한 TV 소리가 흘러나왔고, 천주교 신자인지 성모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실 것을 주겠다 하기에,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다. 긴 얘기가 될 수 있으니.

하늘이 얘길 해달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미리 봤었던 아이 사진이 떠올랐다.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앞니가 살짝 보일 만큼 웃고 있던,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하늘이요?"하고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조씨가 이야길 시작했다.
조하늘양이 실종되기 전, 소풍에 가서 찍은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조하늘양이 실종되기 전, 소풍에 가서 찍은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1995년 6월16일 금요일이었죠"하고, 잊기 힘든 날짜부터 꺼내놓았다. 그 당시 조씨 가족은 서울 구로구 구로4동에 살았다. 재개발 지역이라, 주변엔 건물을 하나씩 부수고 있었다. 이틀 뒤 그의 가족도 이사 갈 예정이었다.

그날 저녁, 조하늘양(당시 5세, 현재 29세)은 친구들과 놀다 집에 들어왔다. 조양 어머니는 밑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그걸 본 조양이 새우볶음을 달라 해 한 움큼 쥐어서 줬단다. 아이는 그걸 나눠 먹겠다고 나갔다. 앞집과 옆집을 들른 건 확인이 됐다. 그리고 골목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동네 아주머니가 "하늘아, 어디가니"하고 물어보니 '씨익' 웃은 뒤 걸어갔단다. 아이는 빨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게 조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3일 뒤에야 시작된 수사, 모든 게 막막했다


옛날엔 실종 아동도 '미아가출인'이라 불렀단다. 가출이란 표현을 썼다. 그만큼 법이 열악했다. 사진은 조하늘양의 현재 추정 모습./사진=남형도 기자
옛날엔 실종 아동도 '미아가출인'이라 불렀단다. 가출이란 표현을 썼다. 그만큼 법이 열악했다. 사진은 조하늘양의 현재 추정 모습./사진=남형도 기자

"하늘이가 안 보인다"는 말에 조씨는 퇴근하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저녁 8시쯤이라 어둑어둑했다. 조양은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다. 길을 몰라 집에 못 올 아이가 아녔다. 넘어져 다쳤을까 싶고, 불량 청소년들이 신경 쓰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행방이 묘연했다. 안 되겠다 싶어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찾아 나섰다. 그래도 조양은 보이지 않았다.

밤 10시쯤, 조씨는 구로3동 파출소를 찾았다. "우리 관할이 아니다"란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구로4동 파출소로 갔다. 이래저래 밤 11시쯤 됐다. 속이 바짝 탔다. 거기서 조씨에게 "연락처를 적고 내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자정이 넘도록 연락조차 없었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차 타고 한 바퀴 돌아본다고 전화가 왔다. 조양을 잃어버린 지 7시간 만이었다.

조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토요일, 날이 밝자마자 구로 경찰서에 갔다. 조서를 쓰고, 정식으로 실종 접수를 했다. 그러는 새 시간이 꽤 흘렀다. 토요일은 오전 근무라 서장 결재가 안 났다. 주말이 그리 흘러갔다. 월요일이 된 뒤에야 탐문 수사를 시작했다. 3일 만이었다. 조씨는 "아이 실종은 골든타임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 시간을 다 놓쳤다"고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게 미비하던 시절이었다. 법이 엉망이었다. 5살짜리 아이를 실종 신고했는데, '가출'로 접수돼 있었다. 조씨가 할 수 있는 건 홀로 뛰어다니는 일뿐이었다. 닥치는 대로 방송에 나갔고, 전국 유치원이며 학교에 전단지를 보냈다. 15년 전쯤, 회사에 전화 한 통이 왔다. 조씨 동료가 받았다. 하늘이라고 하면서, 아빠 이름을 댔다고 했다.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는데 그 전화가 끊겼다. 어른이 소리 지르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단다.

전화번호를 추적하려 천안 KT에 갔지만, 경찰서장 직인을 달라고 했다. 다 받아서 제출했더니 연락 온 게 회사 대표전화라 추적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법적으로 안 된다 했다.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늘이를 유치원에서 졸업시켰다"는 제보에 또 한 번 놀랐는데, 그건 '장난 전화'였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에게, 그렇게까지 전화를 했다.



"이젠 잊으라"는 말 듣기 싫어



조하늘양의 29세(현재) 추정 모습./사진=남형도 기자
조하늘양의 29세(현재) 추정 모습./사진=남형도 기자

조양을 찾겠다고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다 끌어모았다. 가세가 기울었다. 조씨에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마냥 아이만 찾을 수도 없었다. 일도, 가정도 챙겨야 했다. 몸도 맘도 힘든데 힘들어만 할 수 없고, 찾고 싶은데 맘껏 찾기만 할 수도 없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러는 새 2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들도 제법 컸고, 조씨는 다시 조양 찾기에 몰두하고 싶단다. 하지만 "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단다. 막막해했다. 어디 가서, 어떻게 아이를 찾아야 하는지.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뭘 잘못했기에 아이를 못 찾는 건지 답답하다고 했다. "누구한테 조언을 듣고 싶고, 부탁드리고 싶다. 너무 힘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리 외롭고 긴 싸움을, 홀로 이어가고 있었다.

모든 게 '암흑'이고, 시간이 점점 많이 흐르며 난감할 때가 많다고. 그렇게 말하며 떨리는 조씨 목소리를 듣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럼에도 굉장히 듣기 싫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이젠 잊고, 맘 편히 살라"는, 생각한다며 던지는 그 말. 조씨는 "자식 생사를 모르는데, 어떻게 잊고 사느냐"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야길 바꿔, 하늘이가 어떤 아이였냐고 묻자 "굉장히 맑고 쾌활하고 유쾌하고 활기찼다"고 설명했다. 모든 동네 아주머니들이 엄마였고, 잘 따랐단다. 귀여움을 독차지했단다. 입술 밑엔 까만 점이 있었다고 했다. 귓불이 좀 내려온 귀란다. 그걸 상세히 말하는 조씨 얼굴에 짙은 그리움이 간절히 묻어났다. 그의 시간은 멈춘 게 분명했다.

이야길 다 나누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잘 써보겠다고 했다. 그는 담배 하나를 꺼내 태우기 시작했다. 한숨 섞인 연기가 '후' 하고 길게 뿜어져 나왔다.



속 깊은 첫째 딸, "우리 유리가…"


정유리양의 실종 전단지./사진=남형도 기자
정유리양의 실종 전단지./사진=남형도 기자

1989년이었다. 충남서 세 아이와 살던 부부는 생계가 막막했다. 누군가 "도시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아이 할머니에게 맡긴 뒤 경기도 안산시에 왔다. 일하느라 정신없이 1년이 지났다. 돈은 생각보다 벌기 쉽잖았다. 잘 모이지 않았다. 길게 봐야겠다고 여겼다. 그냥 아이들과 같이 지내야겠다고 맘먹었다.

둘째와 막내는 엄마, 아빠를 따라 안산에 오겠다고 했다. 놀 것도, 볼 것도 많은 도시가 좋은 모양이었다. 첫째 딸인 정유리양은 멈칫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인정(人情)이 많았다. 홀로 남겨질 할머니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할머니와 더 지내다, 중학교 때 올라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 정원식씨가 기억하는 정양은, 그리 속이 깊었다.

그래서 아이를 잃어버린 뒤 가슴이 더 무너졌다. 1991년 8월5일, 정양이 충남 시음초등학교 6학년(만 11세)에 재학 중이던 때였다. 여름방학이라 안산에 놀러 왔다. 아빠, 엄마를 보겠다고. 안산 원곡동에 있던 정씨 사촌 여동생 집에 놀러 갔다. 그날 저녁 7시30분쯤 됐을까. 정양은 집 앞 공터서 놀다 "소변을 보겠다"고 들어왔다가, 다시 5~6살 남짓한 사촌 동생들과 놀러 나갔다. 원곡성당 앞길이었다. 정양은 연보라색 민소매 티셔츠와 같은 색 반바지, 검정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어린아이들만 돌아왔다. 아이들은 "엄마, 엄마, 유리 언니를 어떤 아줌마랑 아저씨가 차에 태워 끌고 갔다"고 다급히 얘기했다. 납치였다. 정씨 부부가 황급히 나가봤지만 이미 정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정양을 끌고 간 이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정양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집창촌에, 정신병원까지…다 가봤지만


정유리양 아버지 정원식씨(왼쪽)와 어머니 김순옥씨(오른쪽). 유리양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앞서서 말을 못했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정유리양 아버지 정원식씨(왼쪽)와 어머니 김순옥씨(오른쪽). 유리양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앞서서 말을 못했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지하에서 월세 사는 형편이지만, 경찰은 "돈이 없어도 혹시 (유리양 몸값을) 요구하면 무조건 만나자는 약속을 잡으라"고 일러줬다. 그런 전화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도무지 깜깜무소식이었다. "유리가 어디 있다"는 장난 전화만 야속히 걸려왔다. 애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4~5년을 부부는 미쳐 보냈다. 정씨는 "누구와 대화도 못 하고 성질만 났었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의심부터 했다. 사람을 믿지 못했다. 정양 어머니 김순옥씨도 삶이 애달팠다. 유리란 이름만 들어도 눈물부터 왈칵 쏟아졌다. 김씨는 "세월이 약이라고, 이렇게 보통사람처럼 늠름해졌다"고 하면서도, 대화하는 내내 "우리 유리, 우리 유리"란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세월이 어찌하지 못 하는 모정(母情)이었다.

정씨는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전국 아동 시설은 물론이고, 나쁜 생각까지 들어 집창촌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유리 안에 앉은 여성들을 보며, 유리가 아닐까 싶어 맘을 졸였다. 정양 또래 아이가 어디 있단 말만 들으면, 그게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가선 "얘 본 적 있느냐"며 사진을 보여주고 찾아다녔다. 후천적 장애가 생겼을까 싶어 장애인 시설도 가고, 오죽 답답하면 정신병원까지 찾아갔다. 산도 뒤졌다. 혹시 있을까봐, 혹시 유리일까봐, 그 혹시란 한 가닥 희망 때문에.



사진만 보자 해도, '개인정보법' 때문에 안 된다고



가족사진, 꼭 같이 찍을 수 있기를./사진=남형도 기자
가족사진, 꼭 같이 찍을 수 있기를./사진=남형도 기자

하늘이 아빠에게서 들은 얘길, 정씨한테도 들을 수 있었다. 법이 엉망이라, 찾아다니는 곳마다 너무 많이 힘들었단 그 얘기 말이다.

아동시설에 갈 때마다 "개인 정보라 보여줄 수 없다"는 말에 부딪혀야 했다. 경찰을 데리고 가도 큰 소용이 없었다. 파일이 10년 정도 돼서 파기했단 얘기도 들었다. 혹시 입양을 갔을까 싶어 입양 기관도 여러 군데 찾아갔었다. 그곳 역시 "안 보여준다"고 했다. 정씨가 "사진만 보면 된다"고 애써 청해도 소용없었다. 김씨가 "다른 사람 얼굴 보겠단 것도 아니고 내 새끼 얼굴 보려 한다"며 싸우기도 했다. 그래도 안 됐다. 이를 강제로 볼 수 있는 법은, 지금까지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이런 부실한 법망 속에서, 정씨는 고군분투해야 했다.

누구 하나 힘을 보태주지 않는 가운데, 정씨는 청와대 앞까지 갔단다. 실종 아동들을 찾기 위한 '전담반'을 경찰에 만들어달라고 청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려면, 전담 수사를 할 인력이 경찰서마다 필요하단 거였다. 법안이 발의된 게 있었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부산 금정구)이 지난 5월22일 '실종신고를 접수한 날부터 6개월이 지난 실종아동 발견을 위해 전담 인력을 배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의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이유가 궁금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서 검토보고서를 찾아봤다. 보건복지부는 "경찰청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제약을 줄 수 있으므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경찰청은 "경찰의 수사 관련 업무는 특성에 따라 부서를 운영하니 특정 전담반을 법정하는 건 법률 체계상 맞지 않는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여기에 따르면 경찰청이 아닌, 15개 지방청에만 52명의 장기 실종 아동 전담 인력을 운영 중이란다. 올해 5월 기준, 1년 넘게 연락이 안 되는 장기 실종 아동이 800여명에 달하는데, 이를 찾는 전담 인력은 52명뿐이다.



유리양을 찾아 나섰다



정씨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전단지를 돌리는 데 함께하기로 했다.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다. 늘 홀로 다녀야 했을, 그의 외로웠을 길에 동행하고 싶었다. 내가 나눈 전단지 덕분에 정양을 찾을 거란 한 가닥 희망도 챙기고서.

정오쯤 안산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탔다. 자리에 앉아 전단지를 꺼내려 하는데, 옆 칸에서 질서단속원 두 명이 걸어왔다. 이들이 돌아다니며 전단지 나눠주는 걸 단속한단 얘길 들어서, 전단지를 다시 집어넣었다. 이 와중에 눈치를 보는 게 문득 서글퍼졌다. 정씨는 "일단 내려서 다음 열차를 타야겠다"고 왼쪽 귀에 나지막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역에서 내렸다.

추운 승강장서 기다리며, 정씨가 전단지를 나눠주느라 싸웠던 이들 얘길 들었다. 한 미화원 아주머니가 다가와 "전단지를 달라"고 해서 줬더니, 지하철 바닥에 냅다 흩뿌렸다. 쓰레기가 나오는데, 누가 이런 걸 돌리라 했느냐는 거였다. 정씨는 말문이 막히고, 너무 화가 치밀었다. 지하철 내 이동 상인과도 싸웠단다. 정씨에게 "이걸 돌리고 있으니 내가 장사를 못 한다"고 나무라서. 누군가 신고하는 바람에 역무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지하철이 승강장에 들어왔다. 정씨와 함께 탔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돌아오자고 했다. 정씨 옆을 나란히 따라 걸었다. 정씨는 "원곡동에서 초등학교 6학년 딸 아이를 남자와 여자가 데려갔는데, 아직까지 못 찾고 있네요. 한 장씩 받아보시고 찾아주세요"라고 했다. 그 옆에서 나도 승객들에게 전단지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주세요,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받아서 읽는 이도 많았지만, 본 척도 안 하는 이도 있었다. 귀찮단 표정을 하며 손사래를 치는 남성, "관심 없어요"하며 SNS만 보는 여성이 기억난다. 아이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다시 품에 안을 땐 가슴이 저렸다. 그걸 추스를 새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한 아주머니는 "아이고, 잃어버려서 어떡해요. 어쩌다 잃어버렸어요. 누가 데리고 갔다고요?"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관심 하나가 큰 위로였다.
승강장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내 맘도 이랬는데, 아버지의 맘은 오죽할까 싶어서./사진=남형도 기자
승강장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내 맘도 이랬는데, 아버지의 맘은 오죽할까 싶어서./사진=남형도 기자

다시 첫 칸으로 돌아가는 길엔 전단지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받아서 놓고 내린 이들이었다. 좌석 위에도, 지하철 바닥에도 유리 얼굴이 놓여 있었다. 반으로 접힌 채 출입문에 떨어진 전단지 두 장을, 한 승객이 "여기요, 여기"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걸 보는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가가 황급히 주웠다. 이를 정씨에게 건네며 걱정스레 표정을 살폈다. 그는 전단지를 다시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편 뒤, 다시 껴 넣었다. 얼굴은 덤덤했다, 익숙하다는 듯이.



전단지 한 장에 담겼던, 차마 몰랐던 '이야기'


구겨진 전단지를 펴는, 정원식씨. 아예 동그랗게 구겨버리는 이도 있단다./사진=남형도 기자
구겨진 전단지를 펴는, 정원식씨. 아예 동그랗게 구겨버리는 이도 있단다./사진=남형도 기자

2시간 정도 전단지를 함께 돌렸다. 그래도 꽤 많이 줄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단 정씨가 염려돼,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전단지를 더 달라고 했다. 정씨를 집에 데려다 준 뒤, 혼자 더 돌릴 참이었다.

입김이 뿜어져 나올 만큼 추운 날이라, 얼굴이 얼얼해졌다. 조수석 문을 열어 그를 내 차에 태웠다. 2km 남짓한 이 거리를, 그는 홀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단다. 2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아침 8시 정도부터 오후 5~6시까지. 짧은 시간 전단지를 나눠주며 벌써 지쳐버린 터라, 이걸 어떻게 그리 오래 했을까 싶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아픔이구나',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정씨 옆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나이도 벌써 일흔이 됐다. 머리가 까맸을 정씨와, 다정히 옆에 있었을 딸 유리양을 상상했다. 긴 시간 참 외롭고 막막했겠단 생각이었다. 홀로 버티는 싸움이고, 홀로 무너지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내리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누군가 한 번이라도, 늘 혼자였을 아버지를 태워준 적이나 있었을지.

남은 전단지를 가방에 넣고, 오가는 길에 틈틈이 돌렸다. 광화문역 앞에서 돌렸는데, 주머니에서 손도 안 빼는 이들을 보며 또 맘이 무너졌다. 이해도 했고, 원망도 했다. 인근 쓰레기통에서 전단지를 보고 빼기도 했다. 무력해졌다. 9호선 지하철서 나눠주다가, 한 시민에게 "이런 거 나눠주면 안 되는 거 아세요? 불법이에요"란 말도 들었다. 한 마디 응수하려다, 정씨 얼굴이 생각나서 말았다. 전단지 100여장이 줄어드는 동안, 마음이 얼마나 울컥하고 스러졌는지 모르겠다. 전단지 한 장에 그리 많은 얘기가 담겨 있는지 몰랐다. 차마 일일이 설명하기도, 그럴 힘도 없을 듯했다.

막막한 게 가장 힘들었다.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잃어버린 곳에선 사라진 지 오랜데,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남은 건 어릴 적 얼굴뿐인데, 그게 지금 얼굴이란 보장도 없었다. 도와줄 곳도 없었다. 힘겹게 하루를 보냈는데, 그 하루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몸이 지치는 것보다, 맘이 스러지는 게 더했다. 그러는 동안, 전단지 속 아이 얼굴이 계속해서 날 바라봤다. '이 추운 날씨에 대체 어딨니', 그러니 차마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조하늘씨 아버지 조병세씨에게 물었다. 딸을 만나면 무슨 얘길 하고 싶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한테 무릎 꿇고 사죄하려고요. 25년 동안 키워주지 못해서, 돌봐주지 못해서. 우리 부모가 날 버렸다고 생각할테니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부모는 너를 버린 게 아니고, 지금까지도 널 찾았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고개를 숙인 채 듣다가, 조씨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잘 기록해두겠습니다. 이렇게 노력하셨다는 것. 나중에 하늘이를 만나면 볼 수 있게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정유리양 어머니 김순옥씨가 차려준 점심 밥상. 딸을 찾으면 꼭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데, 그런 생각을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정유리양 어머니 김순옥씨가 차려준 점심 밥상. 딸을 찾으면 꼭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데, 그런 생각을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에필로그(epilogue). 불과 2주가 지나는 동안, 처음 겪는 일이 많이 있었다. 뜬금없이 울컥했다. 아내와 실종 아동 취재한 얘기를 하다, 갑자기 울먹여 화장실에 갔다. 반려견 똘이가 곤히 잠든 모습을 보다, 괜스레 저려 고개를 뒤로 꺾었다.

평소 가장 이성적이었던, 출근길에도 그랬다. 김윤아의 'GOING HOME(고잉홈)'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유리 얼굴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나온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가사가 이랬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기도해본다



  • 남형도
    남형도 human@mt.co.kr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 시선에서 소외된 곳을 크게 떠들어 작은 변화라도 만들겠다면서요.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음 간직하려 노력합니다. 좋은 제보 언제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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