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규제에 묶인 돈 1500조, 여의도로 향할까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규제로 갈 곳 잃은 투자금이 증권 시장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을까. 부동산 시장으로 몰렸던 풍부한 유동성이 일부라도 증시로 향한다면 거래대금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한국 증시에는 호재가 분명하다.


증권가의 시각은 엇갈린다. 국내 증시의 여러 호재성 이슈들로 인해 부동산 투자수요를 흡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자산가들의 자산배분 성향을 고려할 때 부동산과 증시 간 자산 이동 가능성은 적다고 보는 의견도 상당하다. 1500조원에 달하는 시중 유동성의 향배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울 아파트 값 주춤…1500조원 유동자금 어디로?30일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는 103.1로 전주 대비 0.19% 상승했다. 12월 들어 주간 상승률이 0.2%를 웃돌았던 것을 감안하면 지난 16일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 서울의 아파트 값 상승세가 다소 주춤해졌다는 분석이다.

정부의 '12·16' 대책의 핵심은 고가주택 소유자들의 보유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 부담을 늘리고 대출을 억제해 부동산으로 쏠리는 과도한 투자 수요를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대책에 따라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의 LTV(주택담보대출비율)는 9억원 초과분에 대해 기존 40%에서 20%로 하향하고 15억원이 넘는 주택은 주택담보대출을 금지시켰다.

정부가 주택 대출을 억제한 것은 최근 집값 상승 원인의 상당 부분이 실수요보다 투기적 수요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부의 연이은 강력한 대책으로 올 들어 서울 집값은 잠시 주춤했지만 7월부터 반등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울에서 전세 보증금을 끼고 주택을 구입하는 일명 '갭투자' 비중은 8월 46.4%에서 11월 56.1%로 10%포인트 가량 상승했다. 주택 수요 상당수가 실거주가 아닌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 수요였다는 의미다.

아직 대책이 시행된 지 2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택 구입을 위한 레버리지(부채를 이용한 투자)를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부동산 투자 수요를 억제하는 데 어느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정부 대책이 효과를 거둔다면 시장의 관심은 시중의 풍부한 유동자금이 어디로 흐르느냐로 쏠린다. 최근 몇 년 간 집값 상승의 원인 중 하나가 저금리와 대출규제 완화로 인한 유동성 확대로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렸다는 것이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국내 M2(총 통화) 규모는 2874조원으로 이 가운데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M2는 1476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말(1404조원) 대비 72조원(5.1%) 늘어난 규모다. 15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의 유동자금 상당수가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부진했던 증시의 부활…부동산 투자금 증시로 향할까국내 증시가 부진했던 것도 부동산 쏠림현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개인 투자자들의 주요 재테크 수단은 주식 아니면 부동산인데, 주식이 변변찮으니 부동산 말고는 투자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올해 국내 증시의 거래대금은 급감했다. 올해 1~11월 코스피 시장의 일평균 거래대금은 4조9869억원으로 지난해보다 23.8%나 줄었다. 미·중 무역분쟁과 반도체 업황 침체로 인한 기업들의 이익 감소로 증시가 활력을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엔 상황이 달라졌다. 불확실성을 키웠던 미중 무역분쟁이 해소 기미를 보이고, 기업들의 이익 감소 폭도 진정 국면을 보인다. 국내 수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반도체 업황이 개선 중인 것도 긍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덕분에 이달 들어 코스피는 5% 이상 상승하며 '산타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부동산 규제로 묶인 돈이 증시로 유입될만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식 시장이 워낙 안 좋아 부동산 규제의 혜택을 못 봤는데 최근에는 상황이 다르다"며 "다주택자들이 매물을 팔고 여유자금이 생기면 이중 일부는 주식으로 돌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부동산-주식 투자 상관관계 미미…관건은 증시 활성화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재태크성 자금이라도 부동산 투자와 주식 투자는 자금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자산 간 이동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주식 매매는 투자 수요가 대부분이지만 주택 매매는 투자와 실수요가 섞여 있다. 주식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투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탄탄한 수요가 뒷받침되니 가격 변동 폭이 크지 않고 하방 지지선도 주식에 비해 굳건한 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전세'라는 제도로 인해 대출을 규제하더라도 우회적으로 부동산에 레버리지 투자를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실제 통계를 보면 주택 거래대금과 주식 투자금과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감정원 통계를 바탕으로 월별 주택 매매거래 대금(평균 주택가격×거래건수)과 국내 증시에서 월별 개인 순매수 규모를 분석해 보면 상관계수는 0.33이 나온다.

상관계수는 두 변수 간 상관성을 나타내는 수치로 1에 가까우면 정비례, -1에 가까우면 반비례 관계다. 0에 근접할수록 상관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상관계수 0.33은 두 변수 간 상관성이 크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통계적으로는 주택 매매대금이 줄더라도 개인의 주식 순매수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상우 인베이드투자자문 대표는 "보통 자산가들의 자산배분을 보면 그 비율이 잘 바뀌지 않는다"며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은 계속 부동산에 투자하고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은 계속 주식에 투자한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관건은 국내 증시가 투자자들을 끌어 들일 만한 유인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느냐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 개선은 물론 증권거래세 개편 등으로 증시 활성화가 선행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시중 자금은 결국 돈이 되는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라며 "최근 증시 흐름이 좋기 때문에 내년 상반기에는 부동산 규제 효과를 증시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