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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나는 너무 쉽게 열리고 닫히는 서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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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20.0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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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이재무 시인 ‘데스밸리에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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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삶과 문학’으로 등단한 이재무(1958~ )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는 “지난날의 습기 많은 생(生)”(‘시인의 말’)에 대한 추억과 성찰, 죽음을 의식하는 ‘만추의 나이’에 겪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마음)을 시로 형상화했다. “60년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하 ‘귀가’)이라는 시인은 “집에 당도할 때까지 울지” 않겠다 했지만 “몸과 마음이 후줄근히 젖어”(‘감정의 물’) “한 나흘 소리 없이 울고”(‘목련’) 있다.

“나이 47”(이하 ‘엄마에게 쓰는 편지’)에 돌아가신 엄마를 만났을 때 시인은 마음 놓고 울 것이라 한다. 살아생전의 엄마 나이보다 “늙은 자식이 젊은 엄마를 안고” 비로소 울겠다는 다짐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보다 삶의 비장감이 묻어난다.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몰래 온 사랑’), “저 내리는 비와 초록 불과 더불어 내 마음에 자욱해지는 것들”(‘봄비’), “오는 비 고스란히 맞고 싶다”(이하 ‘그리고 내일은 없다’)와 같이 시인은 “생의 한 페이지”를 적시며 “비의 몸을 빌려”(‘우는 것들’) 운다.

빙하기의 들소는 달리다 멈추면 얼어 죽기 때문에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달리면서 이끼를 뜯어 배를 채우고 달리면서 잠을 자야 했다.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 들소는 선 채로 얼음 조형물이 되었다. 지금 이곳 새로 도래한 빙하기를 달리는 들소 떼들은 힘을 아끼느라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있다.

- ‘빙하기 들소’ 전문


“빙하기의 들소”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시인의 또 다른 모습이다. 숙명 같은 가난과 “육 남매 중 장남”(‘실존주의’), 경쟁과 희생, 그중엔 “맏이인 내게 치여 살”(이하 ‘추석 전야’)다가 추석 전날 저녁에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연년생 동생”도 있다. 희생과 혜택 사이의 무거운 짐은 맏이인 시인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부채다.

생존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달리면서 잠을 자야 했”던 빙하기의 들소. “달리기를 멈추”면 순식간에 죽음보다 못한 “얼음 조형물”이 되고 만다. “새로 도래한 빙하기를 달리는 들소 떼”는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지 못”한다. “쓸모를 다한 뒤에야 눕게 된다는 점에서 말과 나무를 닮았다.”(‘서서 자는 사람들’)

나무도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평생을 서서 사는 일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는가

푸른 수의와 잿빛 옷 번갈아 입으며

벌받는 자세로 서서 그늘 짜는

일생의 고역에서 놓여나고 싶은

심정이 천둥과 번개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나무도 눕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생을 벗는 일인 줄 알면서

그렇게 수직의 감옥을 벗어났을 것이다

- ‘쓰러진 나무’ 전문


삶이 너무 고달파서일까. 시인에게 삶은 “스스로 고립의 감옥에 갇”(‘소나무’)히는 것이고, 죽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귀가’)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한정 소비되고”(이하 ‘나는 버려진다’), “먹히고 삼켜지고 소모”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출하되는/ 코드가 새겨진 상품처럼 팔려가/ 함부로 다루어지다가/ 마침내 버려진다.” 시인에게 삶은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가면서 조금씩 해지거나 닿는, 사용 연한이 지나면 폐기 처분되는 상품인 것이다.

시 ‘쓰러진 나무’에서 삶은 “수직의 감옥”이다.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고, “평생을 서서” 산다. 사람도 “서서 먹고 서서 걷고 달리다가 서서 쉬고 잠자다 죽어야 눕는 종족들”(‘서서 자는 사람들’)이다. 사람과 나무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 사람이 나은 건 한 자리에 붙박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나무는 일생을 한 자리에서 생(生)을 견뎌야 한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나무는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푸른 수의와 잿빛 옷 번갈아 입으며”, “벌받는 자세로 서” 있다. 하지만 사람은 “불의한 손과 악수를 나누고 치솟는 분노로/ 병을 깨고 멱살을 잡고, 음흉하게 돈을 세고/ 거래를 위해 술잔을 잡고/ 쾌락을 위해 성기를 잡”(‘손’)았다. 그럼에도 감옥에 갇힌 건 사람이 아닌 나무다. 아니다. “예순한 살”(이하 ‘종신형’)의 시인은 “엄니의 배 속을 나와 육십 년째 형을 살고” 있다. 종신형이다. 나무는 누워 자연으로, 시인은 죽어 엄마에게 돌아가는 것이 출옥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수시로 열리고 닫히는 서랍 속에는 귀중품이 없다

어쩌다 인색하게 자신의 속 내보이는

서랍 안에야 들어있는 비밀하고 값진 것들

아, 나는 너무 쉽게 열리고 닫히는 서랍이었다

- ‘서랍에 대하여’ 전문


시인은 사물에 마음을 얹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이때 시인은 현실적 삶의 반성을 통해 삶의 통찰을 빼어난 솜씨로 보여준다. 시 ‘서랍에 대하여’는 “수시로 열리고 닫히는 서랍”을 통해 “나는 너무 쉽게 열리고 닫히는 서랍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비밀하고 값진 것들”을 너무 쉽게 드러냈다는, “서랍 속의 귀중품”처럼 나 자신도 소중한 사람임을 모른 채 너무 쉽게 살았다는 자책과 반성이다.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서랍일지, 귀중품이 들어 있는 서랍일지는 결국 내가 나를 어찌 대하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렸다는 깊은 깨달음이다.

요즘 “몸피가 자꾸만 줄어드는”(‘가뭄’) 시인은 “스님이 예불을 시작하기 전/ 새벽 마당”(이하 ‘쓴다는 것’)을 쓸거나 “아부지가 식전에 물 뿌려/ 잠든 마당을 깨운 뒤 싸리비”를 쓰는 것처럼 시 쓰기 전에 거실을 쓴다. “밤새 마음 마당에 쌓이고 고인/ 사념들을 쓸어”낸다. “몰래 와서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간 것들”(‘몰래 온 사랑’)의 마음을 쓸어내고 있다. 다음 시집이 많이 기대되는 이유다.

◇데스밸리에서 죽다=이재무/천년의시작/148쪽/1만원.


[시인의 집] 나는 너무 쉽게 열리고 닫히는 서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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