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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봉준호와 호암 탄생 1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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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2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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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사회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봉준호 감독과 영화 '기생충'이 지난 10일 세계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관왕을 차지, 한국 영화 101년 역사상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세웠다.

봉 감독의 선전으로, 동양의 작은 나라 '코리아'의 문화콘텐츠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가수 싸이를 시작으로 방탄소년단(BTS)으로 이어진 K-팝과 K-컬쳐의 한류확산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다.

봉 감독의 시상식에 함께 자리했던 사람 중에 눈에 띤 인물 중 한 명은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CJ가 제작한 영화들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당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도록 압박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음악과 영화 등 문화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이 부회장의 감각은 앞서 110년 전 오늘(1910년 2월 12일) 태어난 그의 조부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자/사진제공=호암재단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자/사진제공=호암재단
사업으로 한국 최대 기업을 일군 호암은 타계 2년 전인 1985년에 출간한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기업 이외의 영역에서 사회에 직접 공헌할 수 있는 길이 무언인가를 모색하던 중 (국내 기업 최초로) 사재를 출연해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했다"고 소개했다.

이 회장은 "인생에 있어서 경제 외의 가치를 도외시할 수는 없고, 사회 일반의 복지 증진 없이 우리 가족만의 행복도 기할 수 없다"며 55세인 1965년 삼성문화재단을 설립, 각종 문화 예술 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유위한(능력이 있고 쓸모가 있는) 인재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학술 문화활동의 창달이 제대로 안된다면 이는 사회적 공평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을 원천적으로 저해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문화 예술 지원 사업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문화예술지원 의지와 영향이 삼성과 CJ를 비롯해 신세계와 한솔 등 범삼성가에 두루 퍼진 것이다.

호암은 1차로 1965년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주식 10억원 상당(당시 서울 시내 50평 짜리 집 한채 값이 250만원 정도, 현재 가치로는 약 400배)과 부산시 용암동 임야 10여만평을 출연했다. 호암이 주식과 토지로 출연한 이유는 카네기 재단 등 외국 재단사례를 조사한 후 출연기금이 잠식되지 않는 형태의 출자 방식을 택한 것이다.

호암은 7년 후인 1971년 자신의 주식과 토지 등 전 재산을 금융기관에 조사·평가하도록 해 당시 돈으로 180억원인 것을 확인, 이를 3등분해 이 중 첫 번째 60억원은 삼성문화재단에 추가 출연했다. 두 번째 60억원은 가족과 삼성그룹 유공 사원에게 주식으로 나눠줬다.

마지막 남은 60억원 중 10억원은 삼성의 사원공제조합기금으로 기증하고, 50억원은 후일에 다시 유익한 사용처를 찾기로 했다. 1971년 주주총회 직후 열린 이사회에서 호암은 재산의 '3분화(三分化)'를 대외에 공표해 되돌리지 못하도록 했다.

호암은 자서전에서 "미국 철강왕 알프레드 카네기의 저서 '부론(富論: Gospel of Wealth: 부의 복음으로도 해석)'에 '잉여재산이란 신성한 위탁물'이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그 위탁물을 어떻게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쓰느냐가 문제다"라고 사재출연이유를 설명했다.

호암은 "재산의 3분화를 결심했을 때만 해도 정치 혼란은 반복되고 있었고, 도의가 땅에 떨어져 우리 사회에는 올바른 가치관도 없어 보였다"고 자서전에 썼다.

호암은 "재산을 3분화한 것 중 한 몫으로 문화재단을 설립한 의도는 도의의 고양과 가치관의 확립을 지원하는 동시에 재정기반이나 내용에 있어서 미국의 카네기 재단이나 스웨덴의 노벨재단에 버금가는 것을 만들어 보려는데 있었다"고 술회했다.

55년 전 호암이 문화재단을 설립할 당시의 정치적 혼란은 이제 양태만 달리 한 채 여전히 55년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또 그가 해소하려고 했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 일반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영화 '기생충'의 소재로 아직 남아 있다. 신성한 위탁물에 대한 사회적 활용은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다.

"내가 태어난 1910년은 한민족으로서는 (가혹하고) 잊지 못할 한일합병의 해였다. (중략)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고난을 무릎 쓰고 나는 삼성을 축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40여 성상을 거쳐 문화 관계의 것을 포함해 30개를 헤아릴 정도로 늘어난 사업이 나의 인생 발자취다."

호암자전 서문에 쓴 것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사업보국과 문화강국의 길을 열었던 호암의 진취적 기개가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 오동희
    오동희 hunter@mt.co.kr

    '기자의 생명은 현장에 있다' 머니투데이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입니다. 추천도서 John Rawls의 'A Theory of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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