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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고통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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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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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이선애 시인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시인의 집] 고통의 향기
2007년 ‘불교문예’ 신인상과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선애(1956~ ) 시인의 첫 시집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는 상처받은 영혼의 후일담 같다.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상처와 통증을 어렵게 길어올린 시인은 진술이라는 몸에 상상의 옷을 입힌다. 사물을 통한 상상은 대체로 자율의지가 결여된, 숨죽여 산 세월에 대한 한(恨)의 다른 표현이다.

감추고 있을 때도 그렇지만 상처는 일단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고통스럽다. 슬픈 기억과 부끄러움, 통증이 증폭된다. 시 ‘토막토막 텅텅’에서 보듯, 사람들은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해댄다. “이방의 눈빛들”과 무심코 “내뱉은 말들”에 상처를 입는다. 말의 사냥꾼들에게 쉬운 사냥감이 된다. 내 의지가 아닌 베란다에 스민 햇살의 도움으로 겨우 “상처를 입지 않는다”.

“사자의 발아래 알몸을 눕”(‘누구나 사자를 기를 수 있다’)히거나 “식욕과 성욕이 다르지 않”(‘다시, 가을’)은, “끝없이 나를 수렵한다”(‘삶은 양파처럼’)라는 문장에서 감지할 수 있듯, 여성으로서 시인은 지극히 소극적이다. 심지어 시 ‘리모컨’에서는 “순종이 나의 생존전략”이라며 “나를 누르는 순간 당신은 꿀꺽, 탄성을 삼키”기까지 한다. 기껏 “사랑이 끝났다고 나를 패대기치지는” 말라고 하소연한다. 이런 내면에는 유년의 “커다란 공포”(이하 ‘날아라,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너무 일찍 공포를 마주한 시인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시인의 말’) 상황에서 “무릎을 굽혔다 펼치며/ 사막을 걷고 또”(‘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걸으며 홀로 견딘다. 아울러 “낯선 나와 싸우”(‘배후’)고, “오늘은 어제보다 참하게 죽고 싶다”(‘꿈꾸는 그림자’)는 절망감을 극복한 후에야 비로소 “나를 위”(‘식탁’)해 식탁을 차리고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꽃씨를 기다리는 동안’)음을 인식한다.

노을의 뒤편을 달리고 있어
썩은 가을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짚불처럼 타오르는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과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사이에 걸쳐 있는 거미줄
그때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어
등굣길에서 니코틴 냄새를 잠깐 맡았을 뿐인데
빛보다 빠른 속도로 늙어버렸어
침대 커버를 벗기며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가 울고 있어
보랏빛 지문이 목덜미를 잡아당겨
빛과 어둠의 교배 속에서 흘러나오는 상처
검은 비닐봉지를 씌운 채
신음은 부풀고 이른 시각에 찾아온 검은 숲
두 다리 사이로 이어폰을 꽂는다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뚜벅뚜벅 전자음 울리는 소리
악몽을 노래하기 위해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하늘의 흙을 밟으며 뒤로 달린다
서쪽에서 동으로 숲이 지고 있다

- ‘검은 숲’ 전문


시 ‘검은 숲’은 이번 시집의 축소판이면서 서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살아온 환경을 상징하는 ‘숲’은 검다. 한낮이 되어도 빛 한 줄기 스미지 않고, 그 흔한 옹달샘조차 없다. 풀벌레나 작은 동물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을 나는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어두운 방에 갇힌 느낌이다.

검은 숲은 너무 “이른 시각에 찾아”왔다. 그때 “겨우 여덟 살이었”기에 검은 숲의 환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린 시인은 하늘도, 숲 밖도 잘 보이지 않는 검은 숲에 침잠한다. 시인은 “아가, 연못 못 봤니!”(‘사라진 연못’) 서어나무와 대화하고, “뿌리는 하늘로 향한다”(‘철로’) 상상한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가 울고 있”던 시절에 갇혀 있는 동안 시인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늙어버”린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오도 가도 못 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사냥감인 시인은 “두 다리 사이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견딘다. 음악 속에 슬쩍 슬픔을 밀어넣고 운다. 희망조차 없는 암울한 시간이다.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시인은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뚜벅뚜벅 전자음 울리는 소리”에 집중한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막막한 현실에 그저 “하늘의 흙을 밟으며 뒤로”, 태어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제는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여러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는 중이다

- ‘가벼운 산’ 전문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높이 평가”했다는 심사평을 들었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여러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시키는 굴참나무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나눔을 대비시켰다.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등산로에 쓰러진 “아름드리 굴참나무”는 등산객의 기준으로 보면 민폐를 끼치고 있다. 허리가 굽은 “밥장수 할머니”의 신세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죽음 부근에서 나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민폐가 아닌 기여이다. 시인은 이를 “고통의 향기”라 표현한다. 고통에서 향기를 찾아내고, 편견과 살신성인의 미덕을 포착한 시인의 시선과 깊은 사유가 이 시를 빛나게 한다.

어디서 갓 핀 양란 냄새가 난다
어디서는 지글지글 고기 냄새
여기는 아들 냄새
택배로 받은 입대 옷
어찌 보관할까 코를 박고,
떼어놓고 온
그때를 내 몸이 기억해 낸 걸까
너의 냄새가 내게로 온다
안녕 아들

- ‘냄새는 울음이다’ 전문


“길들여지지 않은 주방에서/ 살이 짓무르고 뼈가 녹는 것을/ 죽은 자의 미래”(이하 ‘사랑의 기술 2 –가스레인지’)라 한다. 또 “피를 불타게 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이제 지켜야 할 순결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뼈만 남은 엄마의 젖을 물고 사투”를 벌이던 아이는 장성해 군대에 갔다. 비록 입대를 했지만 든든한 의지처가 생긴 것이다.

아들이 입대하면서 입었던 옷을 받던 날, 하필 어디선가 “갓 핀 양란”과 “고기 냄새”가 난다. 시인은 “코를 박고” 아들의 냄새를 맡는다. 그 뒤의 쉼표는 냄새를 맡는 간극이다. 그 속에는 아들을 “떼어놓고 온” 허전함과 아쉬움, 울음이 스며 있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냄새는 “살아 있는 나를 기억하”(이하 ‘사이버 사파리’)고, “다른 나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이다. 시 ‘가벼운 산’에서 진창에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가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 힘으로 삶을 견디고, 계속 시를 쓸 것이다.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이선애 지음. 상상인 펴냄. 102쪽/1만원.


[시인의 집] 고통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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